▲3일 오후 서울시청앞에서부터 광화문광장까지 한국교회기도연합 주최 '한국교회 기도의 날', 문재인하야 범국민투쟁본부(총괄대표 한기총 전광훈 목사. 총괄본부장 이재오 전 장관) 주최 '문재인 하야 범국민투쟁대회', 자유한국당 주최 '문재인 정권의 헌정유린 중단과 위선자 조국 파면 촉구 광화문 규탄대회'가 열리고 있다. 이재오 전 장관과 전광훈 목사 모습이 대형모니터에 나오고 있다. 2019.10.3
권우성
신약성경 <요한일서> 2장 22절은 "거짓말하는 자가 누구냐?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하는 자가 아니냐? 아버지와 아들을 부인하는 그가 적그리스도니"라고 했다.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가 육체를 갖고 이 땅에 왔다는 점과, 그가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은 자' 즉 그리스도임을 부인하는 적그리스도에 대한 경계를 촉구하는 구절이다. 이어서 <요한이서> 1장 7절은 "미혹하는 자가 세상에 많이 나왔나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심을 부인하는 자라, 이런 자가 미혹하는 자요 적그리스도니"라고 말한다.
그런데 전광훈과 한기총은 적그리스도에 대한 경각심을 고취시키지 않고, 전혀 엉뚱한 사람들에 대한 적개심을 고취시키고 있다. '이승만과 박정희의 대한민국'을 '국민의 대한민국'으로 바꾸려는 사람들을 상대로 적개심을 가질 것을 신도들에게 촉구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를 부인하는 자들과 싸우지 않고 이승만·박정희를 부인하는 자들과 싸우고 있는 것이다.
그 같은 전광훈과 한기총을 바라보며 "목사님들이 왜 저럴까?", "기독교가 왜 저럴까?"라고 의문을 가질 필요는 없다. 한기총은 태생적으로 그럴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적그리스도를 응징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만들려고 나온 단체가 아니라, 민주·진보 진영을 물리치고 이승만·박정희의 나라를 광복시키고자 나온 단체이기 때문이다. 외향은 종교단체지만 실제는 정치단체였다. 1989년 12월 창립 당시의 한기총은 그런 본질을 가진 보수단체였다.
8·15 해방으로 친일파와 보수파가 무력해지고 민주·진보 진영이 득세하자 미군정과 이승만 세력이 구사한 전략 중 하나는, 이북 출신 극우단체인 서북청년단 등을 앞세워 테러 활동을 벌이는 것이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제주 4·3과 여순 사건 같은 끔찍한 만행이 자행됐다.
6월항쟁으로 기가 꺾인 1987년 이후의 보수세력도 유사한 전략을 답습했다. 이들의 전략 중 하나는 이북 출신들을 앞세워 민주·진보 진영을 견제하는 것이었다. 이 전략으로 인해 탄생한 것이 바로 한기총이었다.
6월항쟁 이후 우리 사회에서는 민주화나 노동운동뿐 아니라 통일운동도 한층 더 강해졌다. 세계적으로 탈냉전 열기가 뜨거워지던 이 시기에 한반도에서도 냉전을 녹이기 위한 노력이 가열차게 전개됐다.
문익환 목사의 방북으로 상징되듯이 당시의 기독교도 그런 흐름에 동참했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KNCC)가 1988년 2월 29일 발표한 '민족의 통일과 평화에 대한 한국 기독교회 선언(통일선언)'도 그런 흐름에서 나온 것이었다.
KNCC의 통일선언은 정부가 남북관계를 주도하던 기존 관행에 정면으로 맞서는 것이었다. 민간도 통일 논의에 참여하겠다는 의지를 천명한 사건이었다. 선언 다음날인 3월 1일자 <동아일보> 기사 '기독교회협 통일평화선언 채택'에 정리된 바에 따르면, 통일선언은 통일을 향한 기독교 5대 원칙으로 자주, 평화, 민족적 대단결, 인도주의, 민족구성원 전체의 참여를 제시했다.
또 남북 두 정부에 대한 주문 사항도 있었다. 이산가족이 함께 살 수 있도록 하고, 남북회담이 안 될 때 민간이 나설 수 있도록 하고, 한반도 전역을 비핵화 하고, 휴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대체하고 불가침조약을 체결하며, 민족적 이익에 배치되는 외교적 협상과 조약을 수정·폐지하라는 것이었다. 대담하고도 획기적인 선언이 아닐 수 없었다.
6월항쟁의 열기를 타고 한반도 냉전을 녹이려는 이런 움직임에 대해 보수세력은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민주정의당(민정당) 정권과 더불어 가장 크게 놀란 쪽은 기독교 내의 보수세력이었다. 한경직 목사를 비롯한 보수파 목회자들이 바로 그들이었다.
한경직은 평양 서쪽 해안 지방인 평안남도 평원군에서 태어났다. 해방 직후인 1945년 10월 월남한 그는 그해 12월 2일 베다니전도교회를 세웠다. 이 교회가 지금의 영락교회다.
그는 이북 출신치고는 꽤 신속하게 남한 사회에 정착했다. 1950년에는 기독교구국회 회장이 되고 1955년에는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장이 됐다. 그의 영향력은 이승만·박정희 정권을 지나 전두환 정권 때까지도 시들지 않았다. 전두환 때는 대통령을 위한 조찬기도회에도 참석했다. 이 때문에 6월항쟁 이후 교계 진보세력에 의해 '비민주 목사'로 낙인찍히고 퇴진 압력을 받았다.
한경직은 '통일선언'에 대한 대응을 모색했다. 그의 대응 방식 중 하나는 자신과 조향록 목사 등을 포함한 19명 명의로 1988년 6월 23일자 <동아일보> 7면에 '1천만 기독교 신도들과 성직자 및 국민들에게 드리는 호소문'을 광고 형식으로 싣는 것이었다.
이 글에서 한경직과 동조자들은 "통일운동의 당위성에만 급급한 나머지 안이한 대화와 무절제한 접촉으로 인하여 국민 자유와 국가의 주권에 큰 침해를 당하게 되는 비극은 절대로 다시 없도록 주의해주기 바란다"고 통일운동 세력에게 경고를 날렸다. 온 민족이 염원하는 남북교류가 그들에게는 그저 '무절제한 접촉'으로 보였던 모양이다.
한경직이 이끄는 그 흐름에 대해 이북 출신의 반공주의 목사들이 동조했다. 이들의 세력이 결집한 결과가 이듬해 12월 28일 한국기독교총연합회 창립으로 귀결됐다. 기독교 신문인 <예장뉴스>의 2017년 1월 29일자 기사 '한교총이 한국 교회의 대표가 되려면'에서 설명된 것처럼, '이북 출신+반공주의'라는 한기총의 특색은 2005년에 제11대 대표회장으로 최성규 목사가 선출되기 전까지 확고히 유지됐다.
보수정권에 발맞춰온 한기총, 그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