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대통령의 새마을운동 현장시찰 장면
민족문제연구소
대통령의 돈줄
중앙협의회가 정권과 농촌의 연계를 돕는 역할에 그친 것은 아니다. 박 정권은 이 협의회의 존재를 명분 삼아 새마을운동에 정부 예산을 대거 배정했다. 1970년대 10년간 새마을운동에 투입된 예산은 2조 7500억 원이다. 1972년경에는 짜장면 한 그릇이 100원 정도였다. 이 점을 감안하고 '2조 7500억 원'의 현재 가치를 추산해야 한다.
중앙협의회는 또 다른 목적에도 이바지했다. 박 정권이 불법 정치자금을 수수하는 통로 역할도 했다고 1995년 11월 6일자 < LA 타임스 >는 보도했다. 이 기사를 소개한 그해 11월 7일자 <경향신문> '재벌 헌금, 5공 가장 악랄'은 이렇게 말한다.
이 신문은 익명을 요구한 재벌기업 전직 고위 간부의 말을 인용, 대통령의 정치자금 모금은 박 전 대통령이 새마을운동을 위한 기부를 요청하면서 시작됐다고 전했다. (중략) 한국 최대 재벌 가운데 한 곳에서 일했던 어느 전직 임원은 '대통령에 대한 헌금은 박 대통령 시절 새마을운동에 대한 헌금 형식으로 시작됐으며, 당시 대통령의 보좌관은 헌금을 받으면 그에 대한 영수증까지 끊어주었다'고 회고했다.
농촌 출신이면서도 농촌 문제에 관심이 적었던 박정희가 새마을운동이라는 거대 프로젝트를 벌인 배경에는 이처럼 시멘트 공업의 활로 모색, 도시의 반체제운동에 대한 대응과 더불어 정치자금 모금 등의 현실적 이익이 자리잡고 있었다.
그에 더해 국민의식과 일상을 박정희 자신에 맞게 바꾸고자 하는 의도도 있었다. 박정희가 작사하고 박근령이 작곡한 '새마을 노래'의 첫 구절인 '새벽종이 울렸네/ 새아침이 밝았네/ 너도 나도 일어나 새 마을을 가꾸세'는 물론 좋은 말들이지만 국민생활에 깊숙이 침투하고자 했던 박 정권의 의도를 드러냈다고 볼 수 있다. 이 시기의 중앙협의회는 이런 의도를 감추고 사업의 정당성을 증명하는 도구의 성격을 띠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런 도구에 불과했다 해도 새마을운동이 대성공을 거뒀으니 새마을운동중앙협의회의 역사적 의의를 높이 평가해줘야 할 것이 아닌가? 절대 그렇지 않다. 이 점에서 한국 사회는 인식상의 모순을 범하고 있다.
초가 없애고 마을길 넓히기만
새마을운동을 계기로 '초가집도 없애고 마을길도 넓히고' 한 것은 사실이다. 이런 외형적 변화를 근거로 박정희 이래의 보수 정권들은 '새마을운동은 성공적이었다'고 선전했다.
하지만 지난 100년간 건물을 새로 짓고 도로를 넓히는 일은 전 세계 곳곳에서 일반적으로 벌어진 현상이다. 이런 일은 오랜 옛날에도 항상 있었던 일이다. 차이점이 있다면 지난 100년간은 이런 일이 초고속으로 벌어졌다는 점이다. 세계 전역에서 공통적으로 일어난 현상을 놓고 발전을 운운할 수는 없을 것이다.
새마을운동이 성공적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으려면 '초가집도 없애고 마을길도 넓히'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새마을 노래'의 또 다른 대목인 '소득 증대 힘써서 부자 마을 만드세'란 부분도 성취됐어야 마땅하다.
새마을운동이 성공적이었다면. 1970년대에 수많은 농촌 주민들이 "먹고 살기 힘들다. 여기서는 희망이 없다"며 고향을 등지고 대도시 공장가로 몰려들어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기계 옆에서 쪽잠 자며 겨우겨우 연명한 이유를 설명할 수 없게 된다.
새마을운동이 소득 증대와 부자 마을 조성에 기여하지 못했다는 점은 "도시·농촌간 소득격차를 줄이기 위한 정부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도·농 간의 소득은 해가 갈수록 더 벌어지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는 1979년 10월 3일자 <매일경제> 기사 '도·농 간 격차 더 벌어져'에서도 알 수 있다.
박정희 정권 막판에 나온 이 기사는 "1인당 실질소득을 기준으로 할 때는 농가소득이 74년에 한때 도시 가구의 95% 수준까지 접근했었으나 그 후 계속 떨어져 78년에는 도시 근로자의 65.4%에 불과한 것으로 나타났다"고 보도했다.
이 시기에는 노동조합이 약했기 때문에 노동자 임금도 적을 수밖에 없었다. 이런 시절에도 농촌 가구의 1인당 실질소득이 도시 노동자의 절반을 약간 상회하는 데 그쳤다. 새마을운동에 엄청난 자금이 투입되던 이 시절에 농촌과 도시의 격차는 더 벌어졌으니 박정희 시절의 중앙협의회는 실패한 기구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전두환, 박정희보다 한 수 위
그런 새마을운동 조직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시킨 것이 전두환 정권이다. 전두환 정권은 기존의 새마을운동을 폭력적 국민 지배를 위한 사회정화운동과 연계해 성격을 관 주도 운동에서 민간 주도 운동으로 전환했다. 이를 위해 1980년 12월 13일 새마을운동조직육성법에 따라 새마을운동중앙본부(중앙본부)를 새로 구성하고 그달 19일 이것을 사단법인으로 출범시켰다.
전두환 정권은 새마을운동을 농촌에 국한하는 운동이 아니라 전 국민 운동으로 전환하려 했다. 이에 따라 새마을운동 조직은 종래와 달리 거대 관료제 기구의 성격을 띠게 됐다. <지역민주주의와 관변단체에 관한 기초 연구>는 이렇게 설명한다.
1981년 10월 1일에는 새마을운동중앙본부의 지방 조직으로서 시·도 지부가 설치되었고 1983년 10월 20일에는 시·군·구 지회까지 설치됨으로써 지방 조직이 정비되었다.
또 소수의 공무원들로 조직된 중앙협의회와 달리 중앙본부도 거대 관료제의 외형을 띠게 됐다. 위 책은 이렇게 말한다.
1980년 12월 새마을운동중앙본부 발족 때 2실 5부 12과에 직원 137명이었으나 1987년에는 1실 6부 32과에 1372명으로 늘어났다.
청와대나 국정원에 타 부서 공무원들이 파견되는 것처럼 중앙본부 시절에도 그런 일이 있었다. "특히 1981~86년까지 행정지원 명목으로 내무부·문교부 등 공무원 96명, 각종 투자단체 직원 79명 등 모두 175명을 배치 받아 각 부처와의 연락을 담당했다"고 위 책은 말한다.
중앙본부를 정점으로 시·도 및 시·군·구를 잇는 광범위한 조직을 만들고 이를 삼청교육대로 상징되는 사회정화운동과 연계한 것은 국민과 국가를 수직적 계층구조로 엮고 국민의 일상을 지배하고자 했던 파시즘 식의 조합국가를 떠올리게 한다. 국민의 생업과 정신의식까지 지배하고자 했던 전두환 정권의 의도를 드러내는 일이었다.
박정희 시절의 중앙협의회가 국민 통제에만 활용되지 않고 정치자금 수수의 명분으로도 작용했듯이 전두환 시절의 중앙본부 역시 마찬가지였다. 전두환 동생 전경환씨가 조직을 장악한 것을 계기로 중앙본부는 1981년부터 6년간 256억 원의 성금과 지원금을 기업체 등으로부터 수령했다. 전두환 정권 역시 정치자금 모금의 통로로 새마을운동 조직을 활용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