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09년 4월 30일 오후 서울 서초구 대검찰청에 도착한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모습.
인터넷사진공동취재단
11년 전 4월 30일 노무현은 착잡한 심정으로 버스에 올라 봉하마을을 출발한 뒤 서울 서초동 대검찰청 청사에 출석했다. 그런 뒤 우병우 검사 면전에서 조사를 받았다. 이 일은 뒤이은 5월 23일의 비극적 사건과 맞물리면서 한국 정치를 움직이는 동력으로 발전했다. 그날의 검찰 출석이 그의 최후를 부추겼다는 인식이 광범위하게 확산된 결과였다.
2014년에 <한국언론학보> 제58권 제5호에 수록된 이완수·최명일 공동논문 '한국 대통령 죽음에 대한 집단기억: 김대중·노무현 대통령 사후 평가에 대한 미디어의 언어 구성'에 따르면, 2009년 당시의 언론보도들에서는 검찰 수사와 비극적 최후를 연관짓는 일이 많았다. "언론사의 정치적·이념적 성향에 관계없이 검찰 수사에 따른 노무현 대통령의 죽음, 부산에 기반을 둔 정치 역정 및 도전, 재임 시절의 탄핵 등과 관련한 보도가 주로 많았다"고 논문은 정리한다.
노무현을 불행한 방향으로 몰아간 원인 중 하나라는 인식이 확산되면서, 그의 검찰 출석은 비극적 이미지를 띠며 대중의 정치 심리에 영향을 끼쳤다. 이것은 그의 사후에 '노무현 현상'을 새롭게 일으키면서 한국 정치를 바꾸는 원동력이 됐다. 이것의 정치적 의의에 관해 2009년에 <정치평론> 제4집에 실린 김영수 영남대 교수의 논문 '정치와 죽음: 노무현 전 대통령 죽음과 한국 정치'는 이렇게 서술한다.
"(서거 후에) 노무현 대통령의 진정한 모습으로 소개되고 있는 다양한 이미지들과 심볼들은 사실적이라기보다 어떤 의미에서 바로 이 시대의 중산층·서민층의 심상(心象)과 원망(願望)의 반영인 것이다. 그것은 마치 조선시대에 민간에 널리 유포되었던 정진인설(鄭眞人說)이나 아기장수 설화, 최영 장군 귀신 등 다양한 영웅들과 구세주들이 민중들의 심상과 염원을 통해 재탄생되는 것과 유사한 것이다."
노무현의 최후 이미지가 이 시대 민중의 염원과 결부되면서 대중의 정치 심리에 영향을 줬다는 것이다. 부조리한 검찰 수사에 더해 착잡한 검찰 출석이 그런 비참한 최후를 낳은 원인 중 하나였다는 인식이 확산된 것은, 그 출석이 한국인들에게 심어준 강력한 인상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착잡, 환영, 곤혹'
전두환의 경우에는 2019년과 올해의 법원 출석보다 훨씬 더 극적인 일이 1995년 12월 3일 일요일에 있었다. 전날 골목성명을 통해 검찰수사를 거부하며 김영삼 대통령을 신랄히 비판한 뒤 고향 합천에 내려간 그는 다음날인 일요일 새벽 잠옷 바람으로 체포돼 안양교도소로 끌려갔다.
이 사건은 5.18 진상규명과 전두환 정권 청산을 열망하는 국민들에게 통쾌함과 착잡함을 동시에 안겼다. '착잡... 환영... 곤혹... 충격의 휴일'이라는 그해 12월 4일 자 <동아일보> 기사의 제목처럼, 이 사건은 광주학살 진상 규명과 5공(제5공화국 정권) 청산을 희망하는 대중에게 복합적인 느낌을 선사했다.
환영과 통쾌가 더 많았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런 감정이 전부는 아니었다. 그 사건이 주는 복합적 느낌으로 인해 노무현 출석 및 서거 때처럼 어느 한 가지의 대중심리가 대표적으로 발현되기는 힘들었다.
그해 12월 4일 자 <한겨레> 기사 '전씨 구속 축하 술·안주 공짜'에 소개된 서울 성동구 마장동 서울갈비집 정종선 사장처럼 전두환 구속의 기쁨을 함께 나누려는 사람들도 많았다. 정종선 사장은 공짜 제공을 알리는 플래카드를 내걸고 손님 100여 명에게 육회와 소주를 나눠줬다. 그는 광주항쟁 당시 계엄군에 체포돼 1년여간 옥고를 치른 적이 있었다. 그는 "국민의 승리"라며 기뻐했다.
반면, 전두환을 싫어하면서도 뭔가 착잡하고 찜찜해 하는 이들도 있었다. 전두환 세력의 도움을 받고 대통령이 된 김영삼이 5공 청산을 하겠다며 전두환을 구속했으니, 의심의 눈초리가 생기는 것도 당연했다.
그런 착작함과 찜찜함 때문에 주먹질을 하는 사람도 있었다. 부산시민인 50세의 양 아무개씨는 전두환이 구속되던 날 밤중에 울산에 들렀다가 택시를 타고 귀가하던 중 29세 승객과 합승한 뒤부터 기분이 나빠지기 시작했다. 동석한 승객이 전두환을 너무 닮았기 때문이었다.
양씨는 "너도 전두환과 똑같은 놈이어서 내가 응징하겠다"며 파출소 앞에서 택시를 세운 뒤 승객을 끌어내리고 다짜고짜 폭행했다. 파출소 앞에서 일이 벌어졌으니, 잠시 뒤 두 사람은 경찰관 앞에서 조사를 받게 됐다. 신문기사에는 나오지 않았지만, 이때 양씨는 한번 더 놀라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자기한테 맞은 그 승객 역시 '전씨'였기 때문이다.
전두환 구속이 완벽한 통쾌감을 주지 못하고 이처럼 감정을 남기게 된 것은 무엇보다 구속 및 처벌로는 해소되기 힘들 정도로 사회적 원한이 사무쳤기 때문일 것이다. 전두환과 그 세력이 지은 죄악이 태산 같기 때문에, 그들이 아무리 타격을 입는다 해도 국민적 한은 쉽게 사그라들지 않을 것이다.
또 전두환에게 분노나 원한을 품는 데 익숙한 대중들로서는 그의 구속이 주는 통쾌감을 자연스레 수용하기 힘들었을 수도 있다. '분노를 주는 전두환'이 갑자기 '통쾌함을 주는 전두환'으로 바뀌었으니 그럴 만도 했을 것이다. 이처럼 대중 심리에 미치는 영향이 제한적이었기 때문에, 전두환 구속은 그 방식과 전격성이 어느 정도 후련함을 준 것을 제외하면 대중의 정치행동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기 힘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