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일한국민주통일연합(한통련) 출범 당시 모습
진실위 자료사진
국군 보안사령부(아래 보안사) <대공30년사>에 따르면, 1977년 4월 15일 부산대생 재일교포 유영수는 같은 유학생 원영삼의 이모부인 박아무개 육군 준장에게 "김일성을 찬양하는 내용을 담은 '불온서신'(이적표현물)을 전달했다." 그리고 이 '불온서신'을 읽어본 박아무개 준장은 곧 보안사에 신고했고 유영수는 즉시 보안사 수사관들에게 체포된다.
그러나 2011년 이 사건에 대한 재심 판결문을 보면 당시 '불온서신'의 "내용이 국가의 존립 안전을 위태롭게 하거나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위해를 줄 명백한 위험을 초래하는 것이 아닐 뿐만 아니라 이적행위를 할 목적도 없었다"고 명시하고 있다.
그럼에도 당시 보안사 수사관들은 유영수 동생인 한양대생 재일교포 유성삼도 1977년 4월 17일 검거하고 가택수색을 한다. 이때 수사관들은 유성삼의 하숙집에서 이른바 '불온서적'인 김지하의 <법정투쟁기>, 김명식의 시 "10장의 역사연구", 함석헌의 <씨알의 소리>, 장준하의 <사상계> 등을 발견한다.
보안사는 이 책자들을 유성삼에게 준 사람이 김정사라는 유성삼의 진술에 따라 1977년 4월 21일 서울대에 다니고 있던 재일교포 김정사를 체포한다. 또한 유성삼과 같은 과에 다니고 있던 재일교포 손정자도 1977년 5월 5일 검거한다.
당시 보안사에 따르면 김정사는 재일한국민주회복통일촉진국민회의(아래 한민통, 1989년부터는 '재일한국민주통일연합'으로 변경, 아래 한통련) 간부 '임계성'에게, 유영수는 재일공작지도원 '이시다'에게, 그리고 유성삼은 형 '유영수'에게 지령을 받고 국내에 잠입해 간첩행위를 했다는 것이다.
'고문하다 죽으면 한강에 흘려보내' 위협
지난 2007년 필자가 몸담았던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아래 진실위)에서 김정사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회상했다.
"1977년 4월 19일 서울 관악구 신림동 하숙집 현관에서 보안사 수사관들이 '네가 김정사야? 너 유성삼 알고 있지?'하고 물어 알고 있다고 하자 두 대의 승용차 중 한 대에 태웠는데 다른 승용차에는 유성삼이 타고 있었으며, 차에 타자 양 손목에 수갑을 채우며 '너 북괴에 몇 번 갔다 왔어?', '이 빨갱이 새끼야' 등의 욕을 했다."
그리고 그 후 김정사는 강제로 보안사에 끌려갔고 보안사에서 겪은 고문조사 경험을 진실위에서 이렇게 진술했다.
"서빙고분실 2층에서 수사관들에 의해 주먹과 몽둥이 등으로 뺨, 얼굴, 허벅지, 엉덩이 구타, 다리에 몽둥이 끼운 채 밟기, 수건을 덮은 채 얼굴에 물 붓기, 엄지손가락에 전화선 연결해 전기고문, 엘리베이터실에서 물고문, 전기고문 등의 가혹행위를 당해 왼쪽 고막이 파열되었고 지금까지 다리가 불편한 상태다."
김정사는 지난 2007년 국방부과거사위원회에서도 당시 보안사에 연행된 후 겪은 고초를 이렇게 증언한 바 있다.
"전화기와 비슷하게 생겼으며 손으로 돌리는 형태이고, 양쪽으로 선이 두 개 있는 것을 양손의 엄지손가락에 감아서 전기고문을 받았는데, 그 상처는 한 달가량이 지나면 사라져서 재판과정에서는 입증하기가 어려웠다. 의자에 앉아서 고개를 뒤로 젖히고 얼굴에 수건을 얹고 주전자로 물을 부어 숨을 못 쉬게 하는 물고문도 받았으며, 고문을 매일 받은 것은 아니고 제가 쓴 진술서가 그들의 기대에 못 미치는 일 등이 있을 때에 가해졌다.
한번은 '너 엘리베이터 타볼래?'하면서 다른 방으로 끌고 갔는데 그 엘리베이터는 4개의 쇠로만 연결되어 받침만 있었고 위아래로 연결된 것으로 '이 엘리베이터는 북괴 간첩을 고문할 때 쓰는 것인데 고문하다가 죽으면 시체를 한강에 흘려보내 신원불명의 시체로 처리된다'고 위협했고, 하루는 수사관이 제 뺨을 때려 왼쪽 고막이 파열되었고, 의사가 보안사에 와서 치료를 했고, 60세 정도로 보이는 박모라는 일제 특고 경찰이었다는 사람한테 전기고문, 물고문 외에 다리 사이에 나무를 끼고 무릎을 꿇게 한 상태에서 무릎을 발로 밟히는 고문도 당했다."
1977년 서울고등법원 첫 공판에서 김정사는 변호인 김옥봉이 수사기관에서 자백한 사유를 묻는 질문에 "수사기관에서 그렇게 진술한 사실이 없으며, 고문에 못 이겨 조서 말미에 무인을 찍었다"라고 대답했다. 또한 당시 변호인 이병용이 김정사에게 "보안사에서 조사받을 때 자유스러운 분위기에서 조사받았나?"라고 묻자 "(조사관들이) 전기고문, 물 먹인 몽둥이로 때렸다"라고 진술했다.
당시 상고이유서에서도 김정사는 "(그때) 고문에 견디지 못해서 허위자백을 했고 검찰에서는 경찰조사관(보안사 조사관)이 입회하고 협박해서 허위자백을 했다"고 증언했다.
지난 2007년 국방부 과거사위에서 김정사는 1977년 당시 재일지도원 임계성에 대해 "보안사에 연행되어 수사관들이 일본에서 만난 사람을 다 적으라고 해 일본에서 만난 사람을 적었는데 유학 오기 전에 만난 적이 있는 임계성이라는 이름을 적었고, 임계성과는 두 차례 정도 만난 것은 사실이나 강연회에 참석해 임계성의 강연을 들은 뒤 묻고 싶은 바가 있어 임계성을 찾아갔었고, 시간이 없으니 다음에 만나자고 해 나중에 만났지만 임계성으로부터 지령을 수수한 사실은 없다"고 진술했다.
김정사는 또한 당시 항소이유서에서 "임계성으로부터 공산주의에 관한 교양을 받은 바도 없고 또 간첩 지령을 받은 바도 없으며 그에게 국가기밀을 제보한 사실이 없는데도 수사기관에서 조사 중 견디기 어려운 신체적 정신적 사정(고문)이 있어서 사실 아닌 허위자백을 했으므로 이를 토대로 한 공소사실은 너무 억울하다"고 적었다.
"가장 힘들었던 것은 옆방에서 들려오는 동생의 비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