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8년 귀국 전 해에 캠브리지대에서 가족들과 함께 있는 박노수 교수
진실위 자료사진
박노수(1933-1972)는 1953년 미국 하와이대학에서 유학하다 1955년 27일간 잠시 귀국했다. 그 후 그는 일본 도쿄대학 법학부로 유학 갔다. 일본 유학 중인 1961년 박노수는 영국 캠브리지대학 초청으로 동대학 법학부에 입학하고 1966년 결혼해 캠브리지대에서 초청연구원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김규남(1929-1972)은 박노수 교수의 일본 도쿄대 동창으로 1967년 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김종필의 추천으로 공화당 전국구로 당선된 여당 국회의원이었다.
김판수(1943- )는 서울대 영문과 재학 중 친구의 외삼촌 박노수 교수의 주선으로 1966년 영국과 덴마크로 유학 가 2년간 공부하고 귀국했다
1960년대 독일은 분단국가였지만 공산주의 진영이었던 동베를린과 자유주의 진영이었던 서베를린의 교통이 자유로웠다. 그래서 이런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박노수·김규남·김판수 등은 다른 외국인들처럼 동베를린을 방문했다.
그리고 이런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박노수와 김규남은 북한도 한번 방문했다. 이들은 평소 남북관계개선과 미래의 평화통일문제에 관심이 많았고 북한에 대해 학문적 호기심도 많았다. 문제는 박정희 정권의 허가를 받지 않은 이들의 방북이 국가보안법과 반공법 위반 사항이었다는 점이다.
1966년 이들의 무단 방북이 있고나서 3년 후인 1969년 2월 박 교수는 영국 캠브리지대학 생활을 정리하고 15년 만에 국내 대학에 직장을 얻어 고국에 돌아왔다. 오랜 해외생활 탓에 박 교수의 국내 인맥은 당시 김종필의 측근 김규남 공화당 국회의원과 외조카의 친구 김판수 외에는 별로 없었다.
금의환향의 꿈을 안고 박 교수가 입국한 지 두 달 만인 1969년 4월 이들은 모두 간첩혐의로 중앙정보부(아래 중정)에 연행되어 조사를 받는다. 중정은 박 교수가 귀국하기 2년 전인 1967년에 터진 동백림 사건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우연히 이들이 무단으로 동베를린과 북한을 방문한 사실을 알게 됐다.
가혹한 고문 조사를 받고 나서 3년 후인 1972년 캠브리지 법대 교수였던 박노수와 김종필의 측근이자 여당 공화당 국회의원 김규남은 '간첩죄'로 사형장의 이슬로 사라진다. 그리고 이들의 후배 김판수는 국가보안법 위반 죄 등으로 5년형을 받고 수감 중 1973년 가석방 됐다.
박정희의 처조카 김종필의 추천으로 공화당 국회의원이 되었던 김규남과 그의 친구 박노수 캠브리지대 교수는 과연 사형선고를 받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져야 마땅했던 간첩이었던 것일까? 그들이 간첩이 아니었다면 박정희는 왜 처조카 김종필의 측근을 간첩으로 조작해 죽일 수밖에 없었을까?
아무 설명 없이 매질부터 시작했다
김판수는 지난 2008년 필자가 몸담았던 진실화해위원회(아래 진실위)에서 1969년 중정에 연행될 당시를 이렇게 회상했다.
1969년 5월 1일 새벽 친구인 서아무개가 갈현동 집으로 찾아와서 나갔더니 모르는 남자 셋이 조사할 게 있다며 검은색 차에 타라고 했다. 중정에 끌려가서 일주일에서 열흘쯤 조사받고 서대문구치소로 갔는데 가족은커녕 변호사도 한 달이나 지나서 만나게 해주었다. 중정에서 수사관들이 아무 설명 없이 매질부터 시작했다. 몽둥이로 때리는 건 기본이고 동베를린 두 번 갔다 온 증거가 필요하다며 여권이 어디 있느냐고 해서 모르겠다고 하니까 물고문을 했다. 침대봉을 무릎사이로 끼워 마치 통닭처럼 매달아서 주전자에 찬물을 담아 입 아래쪽에 부으면 그냥 입이 벌어져서 입 속으로 물이 들어가는데 숨도 제대로 쉴 수 없을 정도였다. 전기고문도 받았다. 야전 전화기, 그러니까 돌리는 전화기의 전선을 양 손에 감고 전화기를 돌려서 전기를 통하게 하는 고문이었다.
한편 진실위 조사에 따르면 박노수는 1969년 4월 29일, 김규남과 김판수는 5월 1일 중정에 연행된 뒤 5월 5일 구속영장이 한꺼번에 발부되어 6일 집행될 때까지 박노수는 8일, 김규남과 김판수는 각 6일 동안 불법 구금된 상태에서 고문조사를 받았다.
김판수는 당시 "고문과 폭행보다 정신적인 공포감을 견디기가 더 어려웠다. '고문하다 죽으면 휴전선 철책 안에 던져놓으면 그만이다'라는 이야기를 하면서 협박했다. 진술서 작성할 때는 잠을 제대로 못 자서 멍한 상태라 무슨 내용을 쓰는지도 모르고 썼다. 사실 고문과 협박에 의한 충격으로 거의 공황 상태였다. 동베를린에서 북한구성원으로부터 공작금을 받았다는 것도 강요에 의해서 자백한 것이다. 검찰 조사를 받을 때에도 검사가 아주 무식하고 지저분하게 욕설과 위협을 가하며 '반공법 위반한 너희들은 어떤 처분을 받아도 싸다'면서 계속 공포분위기를 조성하고 사람 취급을 안 했다. 우리나라 검사가 왜 이 모양인가 걱정을 다 했을 정도였다"며 가혹한 고문과 강압 상태에서 중정과 검찰에서 조사를 받았다고 진실위에서 진술했다.
공동피고인 김아무개는 상고이유서(1970년 5월 23일)에서 수사기관의 강요와 우격다짐으로 사실과 다른 내용이 범죄 사실로 수사기록에 기재되었고, 검찰에서 검사의 조서작성 과정 역시 임의성(진술자의 자유로운 의사에 따라 진술이나 자백을 하는 것)이 전혀 없었다고 썼다. 진실위에서도 중정에서 조사받는 동안 구타, 잠 안 재우기, 물고문, 전기고문을 받았다고 다음과 같이 진술했다.
연행되어 조사실로 가려고 복도를 걸어가는데 수사관들이 주먹을 날리기 시작했다. 다른 사람들보다 늦게 잡혔는데 그동안 어디에 숨어 있었느냐며 마구 때렸다. 조사실에서는 모아무개가 내 구두를 벗겨 그 구두로 분풀이 하듯이 때렸다. 다른 수사관이 들어 와서는 물에 젖은 수건을 손과 발에 묶고 전깃줄에 엮어서 전기고문을 했다. 전기고문하면서 모아무개가 '평양 갔다 왔냐?'고 딱 한 질문만 했다. 계속 고문을 하는데 살점이 모두 떨어지는 고통이었다. 여러 번 까무러쳤다. 옷을 벗기고 손과 발을 묶어서 다리 사이에 막대기를 끼워 대롱대롱 매달리게 하고는 물을 붓는 고문을 당했다. 그 고문도 견디기 힘들었지만 옷 입은 사람들 앞에 옷을 다 벗고 있는 것이 수치스럽고 모멸스러워 내가 짐승보다 못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서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발로 차는데 그때 맞은 후유증으로 지금도 왼쪽 허리 쪽이 시큰거린다. 그렇게 맞고 보니 나중에는 그냥 중정 수사관이 원하는 대로 진술서를 작성하게 되었다. 중정 수사관들이 나를 고문하면서 '김규남도 내가 (고문을) 했다', '김규남의 형도 지금 고문당한다'라는 이야기를 해서 내가 당한 거 생각해보면 김규남은 정말 심하게 당했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모아무개한테 구두로 많이 맞아서 까맣게 피멍이 들어 구치소에 갔을 때 그곳 직원이 내 몸에 피멍든 거 보고 놀랐다. 중정에서 있는 동안 잠을 못 자게 해서 나중에는 비몽사몽한 상태가 되었는데 그 상태에서 고문당하면 그 고통 때문에 정신이 다시 들고 하기를 반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