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첼로 협주곡을 연주하는 자클린.
위키피디아
1962년, 자클린은 루돌프 슈바르트가 이끄는 BBC 심포니 오케스트라와 함께 로열 페스티벌 홀에서 '성인 무대'를 치른다. 이때 그녀가 들고나온 곡이 엘가의 첼로 협주곡이다. 긴 금발에 키가 175㎝인 자클린이 드레스 자락을 휘날리며 무대에 등장, 치아가 훤히 드러나는 미소를 지으면 관객은 마법에 걸리기 시작한다.
자리에 앉아 지휘자와 눈빛을 주고받은 후, 첫 음부터 엄청난 에너지로 보잉을 시작한다(연주 중간에 줄이 끊어지는 일은 외려 그만의 퍼포먼스처럼 보일 정도다). 보고도 믿을 수 없는 감수성을 내뿜으며 몸을 좌우 앞뒤로 흔들다가 허공을 향해 황홀경에 빠진 표정을 지으면, 혼이 빠진 쪽은 관중이었다. 자클린은 잠들어 있던 엘가의 첼로 협주곡을 단숨에 대작의 반열에 올려놓았다.
사실 엘가가 1919년 이 곡을 만들고 초연했을 당시 관객의 반응은 싸늘했다. 재밌는 사실은 첼리스트인 바비롤리는 엘가의 초연날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 평단원으로 객석에서 관람했다. 다음 해에 솔리스트로 이 곡을 연주했으나, 평가는 그리 좋지 못했다.
1965년, 거물 지휘자가 된 바비롤리는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를 이끌고 자클린과 함께 EMI에서 이 곡을 녹음했다. 이 앨범은 자클린을 '라이징 스타'에서 '어메이징 스타'로 번쩍 올려놓았고, 세상에서 가장 많이 팔린 음반 중 하나가 되었다. 엘가의 첼로 협주곡이 진짜 주인을 만난 것이다.
오스트리아에는 모차르트, 독일의 베토벤, 이탈리아의 비발디, 프랑스의 드뷔시 등등 유명 작곡가들이 쟁쟁한 데 반해, 영국은 음악에 있어 이렇다 할 작곡가가 없었다. 하지만, 자클린의 등장으로 순식간에 영국에도 엘가라는 위대한 작곡가가 탄생한 셈이 되었다. 이러니 자클린이 전 영국인의 사랑을 받을 수밖에.
1965년, 미국 카네기 홀에서 열린 연주회에서 자클린은 역시 엘가의 첼로 협주곡으로 미국인들까지 단숨에 사로잡았다. 다음해 자클린은 모스크바로 가서 당대 최고 첼리스트인 로스트로포비치에게 레슨을 받는다.
그에게 배우기 위해 세계 유수의 연주자들이 몰려들었다. 음악원에서 마지막 날, 참가자들이 장장 4시간 반에 달하는 공개 연주회를 열었는데, 자클린은 로스트로포비치가 지휘하는 학생 오케스트라와 함께 하이든 C장조 첼로 협주곡으로 피날레를 장식했다.
자클린의 자서전에서 로스트로포비치는 "내가 만난 이 시대의 첼리스트 중에서 자네가 가장 관심이 가. 자네는 아주 멀리, 나보다 더 멀리 나갈 수 있어"라고 말했다. 이후, 로스트로포비치는 자클린이 연주한 엘가의 첼로 협주곡을 듣고, 자신의 연주 목록에서 이 곡을 제외했다. 더 이상 완벽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모스크바에서 돌아온 자클린은 당시 음악가들의 아지트였던 푸 쑤옹의 집에서 열린 크리스마스이브 파티에 참석한다. 이곳에서 자클린은 큐피드의 화살을 맞게 되는데, 그 상대가 지금은 이름만 들어도 놀라운 다니엘 바렌보임이다. 하지만 당시 자클린의 유명세에 비하면 그의 지명도는 낮았다. 자클린의 자서전에는 그와 만난 당시를 회상하는 장면이 언급된다.
"나는 덩치가 아주 컸어요. 러시아에서 다섯 달 동안 빵하고 감자만 먹고 지내온 터라 81㎏이나 나갔고 거구가 된 기분이었지요. 내 큰 체격이 아주 신경이 쓰였어요. 그런데 작고 까무스레한 피부의 나긋나긋한 이 사람이 불쑥 들어오더니 나를 뚫어지게 쳐다보곤 '당신은 연주가로 보이지 않는군요!'라고 말하는 거예요. 당시에 부끄럼을 많이 타고 다소 불안정했던 나는 '오, 하느님, 할 일은 하나뿐입니다.'하고 생각했지요. 다행히 내겐 첼로가 있었고 나는 그걸 꺼내서 연주를 시작했어요. 그도 나와 함께 연주했고 그때 분명 무언가 일어났습니다. 그건…. 마치 우리가 평생 함께 연주해온 느낌이었어요. '내가' 다른 사람과 이 정도로 교감할 수 있다는 사실은 내게 엄청나게 큰 충격이었습니다."
피아니스트이자 지휘자인 바렌보임은 부모님 모두 피아노 레슨했던 음악가로 뱃속에서부터 피아노 소리를 듣고 태어난 천재 음악가다. 그는 이스라엘 출신의 유대교였다. 그와 첫눈에 사랑에 빠진 자클린은 망설임 없이 청교도에서 유대교로 개종한다.
1967년, 아랍국가들과 이스라엘 사이 전쟁이 임박했다는 소식을 들은 자클린과 바렌보임은 바렌보임의 부모님이 거주하는 이스라엘 텔아비브로 날아갔다. 둘은 이곳에서 이스라엘 국민에게 응원과 연대의 의미로 연주회를 열었고, 전쟁은 6일 만에 승리로 끝이 났다. 둘은 통곡의 벽 인근에서 갑작스레 결혼식을 치른다.
이 결혼은 슈만과 클라라의 결혼에 비견되며 세기의 결혼으로 떠들썩했다. 예식장에는 급하게 날아온 자클린의 부모님과 남동생, 그리고 이스라엘 수상인 데이비드 벤구리온, 예루살렘 시장, 국방부 장관 등 유명인사들이 출동했다. 이 기습적인 결혼에 대해 영국에서 유일하게 소식을 전한 건 <데일리 메일>이다.
"신동이었던 재클린느 뒤 프레와 지휘자이자 피아니스트인 다니엘 바렌보임이 9월에 결혼식을 올린다고 발표했었지만, 그들은 예상치 못한 시기에 그곳에 있었고 그래서 그곳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자클린이 첼로, 피아노는 바렌보임, 주빈 메타가 더블베이스, 이츠하크 펄먼이 바이올린, 핑커스 주커만이 비올라를 들고 슈베르트 피아노 5중주인 숭어를 연주한다. 믿을 수 없는 별들의 조합은 지금 봐도 놀랍기만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