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한을 선택해 저항하며 돌아왔지만 그를 기다린 것은 고문과 폭력이었다.
한톨
너무 먹고 살기 힘든 그 시절이라 돈만 있으면 너도 나도 목숨 걸고 밀항을 하려 할 때였다. 그런데 한밤중에 갑자기 찾아온 이복형은 당시 일본으로 밀항해서 밀무역을 하고 있다고 했다. 외국인 등록증과 거류 민단증도 보여주었다. 그리고 솔깃한 제안을 했다.
"나를 데리고 일본으로 가서 무역업을 시키면서 돈을 벌게 하겠다는 거야. 그 말을 들으니 나도 설렜지. 일부러 밀항을 가려고 애써도 못 가는데 나를 데려가겠다고 하니 나도 어머니도 다들 좋아했지. 아무런 의심 없이 형을 따라 배를 탔어."
그러나 그 배는 일본으로 가는 배가 아니라 북한 해주로 가는 배였다. 속았다는 것을 알았다 해도 어찌해볼 도리가 없었다. 해주에 도착한 그는 형으로부터 한 달간 교육을 받아야 한다는 말을 듣고 어서 탈출해야겠다는 생각으로 꾀를 생각해 냈다. 사실은 자신이 폐디스토마가 걸려 빨리 돌아가 치료받지 않으면 죽어버린다고 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하자고 하는 것에 대해 계속 저항하고 반항하자 결국 그를 데려간 지 4일 만에 돌려보내주었다. 새벽 5시경 예래동 앞 논짓물 포구에 내린 그는 다리가 후들거렸다.
"누가 보는 것만 같고 감시받는 것 같아 등이 따갑고 다리가 후들거리더라고. 그래도 집에 오자마자 신고하자고 어머니한테 말했지."
같이 제주에 살던 이복형의 생모가 신고하는 것을 반대하자 어머니는 나더러 참으라며 만류했다. 어머니의 말을 거역하지 못한 것이 결국 화가 되었고, 1년 뒤 중앙정보부에 연행되었다. 논짓물 바닷가 앞에 서서 탁본을 하던 그에게 물었다. 매일 보고 다니는 이 바닷가가 불편하진 않으냐고.
"잊어야 살지. 생각하면 어떻게 살아. 살려면 잊어야지. 그래도 바닷가는 잘 안 내려와. 그 일이 있는 영향도 있겠지만 마음이 오지 않게 돼. 그래도 간첩이 되고서 다시 고향으로 온 건 내가 간첩이 아니니까 다시 온 거야. 내가 간첩이라고 수군대겠지만 내가 마을 사람들에게 해를 끼친 것은 없잖아. 고향에 뭐라도 이바지하자. 그런 마음으로 열심히 농사를 짓고 살았어. 만약에 지금 이 사실이 방송이나 언론에 나가면 마을 사람들이 오경대는 누구더라고 수군대면서 잊었던 소리가 밖으로 나오겠지. 그래도 사람들 시선을 의식해 걱정하는 것보다 세상에 내가 간첩이 아니라는 것을 알려서 모르는 사람들에게 진실을 알려주는 게 나은 것 같다는 생각을 해."
이복형에게 속아서 북한에 끌려갔던 것이라고 말해봤지만 중앙정보부 수사관들은 갖은 고문과 폭행으로 그를 남파 간첩으로 만들었고, 결국 그는 15년을 감옥에서 보내야 했다. 그가 출소할 당시 나이는 45살. 감옥에서 출소했지만 감옥생활 그대로였다.
"서귀포경찰서 경찰관이 한 달에 한 번씩 찾아와 조사를 해. 어딜 갔나, 육지를 갔나, 다 조사해. 어딜 가건 신고하고 허락을 받아야 해. 언제 어디서 누구와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모두 보고해야 살 수 있어. 김대중 대통령이 되고서야 사라졌지. 한 번은 밭에서 일하고 있는데 형사가 와서는 대통령이 이 마을 앞을 지나간다면서 종일 나를 감시하는 거야. 당하는 사람은 삶의 의욕이 없어져."
그가 마지막으로 들른 곳은 알뜨르 비행장이었다. 이틀간 제주시에서 조사를 받고 서울 남산으로 연행될 때 지금은 흔적만 남아 있는 알뜨르에서 비행기로 압송된 것이다.
알뜨르 비행장에서 서울 남산으로 호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