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동여지도> '경조오부도'에 기록된 '수유현'<대동여지도>에서 한성 지역을 기록한 '경조오부도'이다. 오른쪽 빨간 타원이 '수유현'이다.
서울대학교 규장각 한국학연구소
수유리처럼 끝에 '리'가 붙으면 왠지 도시보다는 지방이라는 느낌이 든다. 하지만 서울 여러 곳에도 '리'가 붙은 지명이 있었다. 미아리, 청량리, 망우리가 그렇다. 현재 서울의 여러 지역이 한때는 서울이 아니었다는 흔적이다.
그렇다면 옛 한성, 서울 사대문 안에 있는 지역만 진짜 서울이었을까. 그렇게 보는 관점도 있는 것 같다. 하지만 조선시대에 한성은 지리적으로도 행정적으로도 사대문 안쪽만 의미하지 않았다. 성 밖에도 한성부에 속한 지역이 있었다. 한성부 도성으로부터 10리, 그러니까 약 4km 이내의 지역을 '성저십리(城底十里)'라 불렀다.
조선은 그 지역에 한성부 산하 행정기관인 방(坊)을 두었다. 수유리는 지금의 종로구, 성북구, 강북구 일부 지역과 함께 숭신방(崇信坊)에 속했고, 정확한 행정구역은 '한성부 성저십리 숭신방 수유촌계(水踰村契)'였다. 지명으로서 수유현(水踰峴)을 언급하는 옛 문서도 많은데, 미아리 고개 너머 양주 방향으로 솟은 낮은 고개를 일컬었다. 그 일대가 지금의 수유동이다. 옛 지도에 그 흔적이 여럿 남아 있다.
조선 시대 동안 한성부였던 이 지역은 1911년에 '경기도 경성부 숭신면' 소속으로 바뀐다. 일제가 경성을 한 나라의 수도가 아닌 한 지방에 속한 도시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1914년에는 일제가 전국의 행정구역을 개편하면서 수유리 일대는 '경기도 고양군 숭인면 수유리'로 다시 바뀐다. 그렇게 일제 강점기 내내 지금의 수유동은 경기도 땅이었다.
해방 후 1949년에 경기도 고양군 숭인면 지역이 서울로 재편입되며 수유리는 '성북구' 관할이 된다. 그 지역이 원래 경성, 서울 땅이었으니 재편입이란 표현이 맞다. 당시 수유동은 '수유리'로 불렸는데 1950년에 서울시 조례에 의해 '수유동'으로 행정지명이 바뀐다.
하지만 이미 동으로 바뀐 지 오래인 1970년대에도 사람들은 수유리라는 지명을 입에 달고 살았다. 시내를 오가던 버스 표지판에도 수유리라고 쓰여 있었고 택시를 타도 수유리로 가자고 했다. 나 또한 지금도 수유리라는 이름이 더 익숙하다.
이 지역을 예전부터 부르던 순우리말 이름이 있었다. '무너미' 혹은 '무네미'. 물이 넘쳐 흐른다는 뜻이다. 아마 북한산 계곡에서 물이 넘치면 마을로 흘러들었던 모양이다. 이를 한자 물 '수(水)'와 넘칠 '유(踰)'로 옮겨 쓴 것이 지명으로 굳어졌다.
그런데 이 지역에 특이한 지명이 하나 있다. '우이신설선' 경전철 노선인 '화계역'과 '4.19민주묘지역' 사이에 있는 '가오리역' 말이다. 산 근처 내륙 지역에 '가오리'가 웬 말일까. 가오리(加五里)는 물고기가 아니라 이 지역의 옛 이름이었다. 조선 시대에 한성의 범위는 한양 도성과 그 바깥 성저십리까지이지만 성저십리였던 이곳에서부터 오리(五里)를 더하여(加) 우이동까지 경성 지역으로 삼았다는 데서 유래를 찾을 수 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