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 연행될 당시 거주했던 집 대문을 탁본한 강희철
변상철
"나는 조천읍 신촌에서 태어났어. 아버지는 내가 태어날 무렵 일본으로 밀항으로 가버렸어. 당연히 먹고 살기 힘드니까 떠난 거지. 먹고 살기 힘드니 3살짜리 어린애를 남겨놓고 어머니마저 일본으로 가버렸어. 난 할머니(김만덕) 아래에서 중학교까지 컸어. 중학교를 졸업할 무렵에 일본에서 연락이 왔어. 부모님이 일본으로 들어오라는 거지. 그래서 75년도에 일본으로 밀항해서 들어갔어."
조천의 한 집 앞에 선 그는 어렸을 적 기억을 꺼냈다. 어려서부터 부모 없이 조모에 의해 자란 강희철은 부모를 잊고 살아야 했다. 부모가 일본에서 간간이 생활비를 보내와 그 도움으로 생활했지만 그것만으로 부모님의 체온을 느낄 수는 없었다. 그는 바다 건너 부모가 있는데도 제주에서 고아 아닌 고아처럼 지내야 했다.
그런 그에게 일본의 부모에게서 일본으로 들어와 같이 살자는 연락이 왔다. 부모님으로부터의 연락은 어린 강희철에게 더없이 기쁜 소식이었다. 오직 부모님과 함께 살 수 있다는 기대감만 있었을 뿐, 죽을 뻔한 위험한 밀항의 뱃길도 참아낼 수 있었다.
"일본에 가니까 고등학교를 가려면 일본에 있는 학교를 가야 하는데 내가 밀항자 신분이니까 학교 입학을 할 수 없는 거라. 아버지는 그래도 고등학교는 졸업해야 한다고 해서 조선학교를 보내주셨어요. 오사카에 있는 조선고급학교였는데 우리로 치면 고등학교지. 조총련에서 운영하는 학교였는데 한국말로 수업하고, 한국 문화와 역사를 가르치는 곳이라 수업에 어려움이 없었지요."
1978년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스스로 경제활동을 시작했다. 신발공장, 프레스공장 등등 종업원으로 전전했다. 그러나 그는 어딜 가더라도 밀항자, 불법 체류자였다. 자신의 신분이 노출되지 않도록 항상 긴장하며 살아야 했다. 그러다 결국 1981년경, 오사카 시내에서 자전거를 타고 가던 중, 누군가의 신고에 의해 출동한 경찰에 체포되었다. 그는 말도 문화도 다른 일본보다는 한국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부모님하고 있어도 어린 시절을 함께 한 기억이 없으니까 뭔가 어색하고 늘 싸우기만 했어. 부모님이야 내가 잘되기를 바라시겠지만 말도 통하지 않고, 신분도 불법 외국인인 내가 뭘 할 수 있을까 회의도 들었죠. 차라리 한국으로 돌아가자. 제주로 가면 친구도 있고, 뭐라도 하면 먹고 살 수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