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네트워크센터 회의실에서 인터뷰하고 있는 뎡야핑.
문세경
"진보네트워크센터(아래 진보넷)에 들어올 때는 5년 정도 일할 생각으로 왔어요. 5년 정도 일하면 내가 원하는 포부를 이룰 수 있을 것 같았어요. 막상 일해보니 5년 가지고는 택도 없더라고요(웃음)."
거짓말 안 보태고 내가 알고 지내는 사람의 5할은 진보넷을 통해 만난 사람들이다. 진보넷은 2004년에 블로그 서비스를 시작했다. 블로그는 웹(web)과 로그(log)의 줄임말이다. 로그는 dialogue에서 파생된 말이고 '독백'의 뜻과 상통한다. 나는 웹에 일기를 쓴 셈이다. 물론 공개된 글이니 누구나 볼 수 있다. 사회문제를 고민하고 의식이 있는 사람들은 진보넷 서버를 이용해 홈페이지를 만들었다. 블로그를 쓰는 사람들도 늘어났다. 우리는 각자의 방에 쓴 일기를 보고 '소통'하고 (댓글로)'공감'했다. 대부분 별명을 썼다. 내 이름은 '스머프'였고, 지금도 온라인에서는 그렇게 부른다.
뎡야핑은 2004년에 진보넷 블로그를 시작했다. 많은 블로그 이용자 중 가장 왕성하게 글을 썼다. 나는 가끔 '내 방'에 들어가 본다. 그때 쓴 글을 보며 유치했던 지난 날이 떠올라 웃음이 터진다. 벌써 16년의 세월이 흘렀다.
추석이 일주일 앞으로 다가온 9월 20일 퇴근 후, 서대문의 진보네트워크센터 기술팀에서 상근활동가로 일하고 있는 뎡야핑을 만났다.
"사회 많이 달라진 걸 느껴... 2014년이 가장 힘들었던 해"
"11년째 활동하면서 사회가 많이 달라졌다는 걸 느꼈어요. 2014년 세월호 사건이 터지고 관련 작업을 많이 했어요. 진보넷 기술팀은 개별적인 이슈를 지원하기보다는 사회운동 전체를 지원하는 것에 포커스가 맞춰 있어요. 몇 개 이슈가 비중이 커지면서 저의 관심사가 바뀌었어요. 미디어 환경이 변하니까 기존 방법으로는 부족하다는 걸 깨닫고 유튜브 쪽으로 관심을 돌렸어요. 새로운 세대, 10대부터 20대들이 유튜브에 소비하는 시간이 엄청나게 많다는 걸 알고 깜짝 놀랐거든요. 그래서 사회운동을 영상으로 만들어 전달하자는 아이디어를 냈어요. 5년만 활동하겠다고 마음먹은 게 '무기한'으로 바뀌었어요(웃음)."
'뎡야핑'은 친구들과 탁구를 치다가 중국의 탁구 선수와 닮았다고 친구들이 지어준 이름이다. 실제로 뎡야핑은 중국의 탁구 선수 '덩 야핑'과 닮았다. 우리는 온라인에서 거의 매일 만났고, 온라인에서 다 풀지 못한 회포는 오프라인으로 이어갔다. 온라인에서 소통한 후라 오프라인 만남에서는 더 풍성한 대화가 이어졌다. 세월이 흐르고 페이스북이라는 지구적 소셜 미디어가 출몰했다. 많은 이들이 버스를 갈아탔다. 나 역시 예외가 아니다.
"11년 동안 활동하면서 가장 힘들었을 때는 2014년도였어요. 왜냐하면 제가 '팔레스타인 평화연대'라는 단체에서도 활동하고 있거든요. 그곳은 상근 활동가가 없어요. 비상근으로 활동해요. 2014년에 세월호 사건 때문에 자료 만드느라 힘들었는데 그해 7, 8월에 팔레스타인이 대규모 공습을 받아서 2500명이 넘는 사람이 학살당했어요.
팔레스타인인의 사망 숫자를 집계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았어요. 한 명 한 명의 이름을 쓰고 그 사람들의 삶이 어땠는지,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매일 팔레스타인에서 내보냈어요. 그걸 읽고 한국 사람들한테 전달해야 하는데 세월호 사건이랑 기간이 겹쳐서 많이 힘들었어요. 매일 밤에 팔레스타인 사망자 현황 뉴스 보고 내보내고, 밤새 울고 잠 못 자고. 다음 날 출근해서 세월호 자료 정리하면서 또 울고. 하루하루를 그렇게 보내느라 정말 힘들었어요."
한꺼번에 안 좋은 일이 터져서 얼마나 정신이 없었을까. 더구나 뎡야핑은 두 단체에 몸담고 일하는 처지였으니 슬픔도 두 배였을 게다. 상근이냐, 비상근이냐는 중요하지 않다. 내가 맡은 일을 얼마나 책임있게 하느냐가 뎡야핑에게는 더 중요했다. 오늘따라 뎡야핑이 꽤 멋있어 보였다.
"활동한지 십 년이 넘었으니까 많은 일들이 있었죠. 저는 이 일이 재미있어요. 월요일에도 즐거운 마음으로 출근해요. 보람이나 성과에 대해 특별히 생각해 본 적 없어요. 그런데 지금 하고 있는 '따오기(따져보는 오늘의 기술이야기)'사업은 유튜브라서 조회수가 보이니까 신경이 쓰여요.
진보넷은 내부 분위기가 좋아요. 저는 가족같은 분위기를 싫어하는데 여기는 웬만큼 '거리감'이 있고, 서로를 대하는 태도가 잘 맞아요. 일과 사생활을 잘 분리해요. 서로 존중하고 배려하고. 그래서 오래 일하는 것 같아요(웃음). 저는 20대 중반까지만해도 '사회성'이 많이 부족한 사람이었어요. 이제라도 사회성이 생겨서 다행이죠(웃음)."
뎡야핑은 법대를 다녔다. 학생운동이 전멸하다시피한 때 학교를 다니느라 스스로의 정체성을 찾기가 쉽지 않았다. 학교를 그만두고 싶었지만 대안을 찾지 못해 꾸역꾸역 학교를 다녔다. 결국 사회운동을 해야겠다고 마음먹고 졸업 전에 여러 단체를 찾아다녔다. 하지만 마음 맞는 곳을 찾지 못했다. 그러던 중 '팔레스타인 평화연대'라는 곳을 만났다. 그곳은 본인의 활동을 스스로 기획해서 자율적으로 일할 수 있는 곳이었다. 그렇게 인연을 맺은 '팔레스타인 평화연대 활동'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뎡야핑은 진보넷 활동 중 안식월이 되면 무조건 팔레스타인에 간다.
안식월 때마다 찾는 팔레스타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