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호병씨 사진 두 번째 줄 왼쪽 박호병 씨가 직장동료들과 함께 포즈를 취하고 있다
김예린
1983년 6월 30일. '이산가족을 찾습니다' 첫 방송된 날이었다. 방송에서는 한국전쟁으로 잃은 가족을 찾는 외침이 끊이질 않았다. 티브이 앞에 앉은 할머니와 엄마는 눈이 퉁퉁 붓도록 눈물을 훔쳤다. 다음 날도 방송은 계속됐고 비가 억수같이 쏟아졌다.
할머니 집 전화가 요란하게 울렸다. 한 병원 증축 공사장에서 일하던 박호병씨가 감전돼 숨졌다고 했다. 전국 흩어져 헤어진 이들이 서로 찾아 얼싸안던 날, 할머니는 둘째 아들을 더 이상 안아볼 수 없게 됐다.
소주 한잔 입에 대지 않았던 할머니는 박호병씨가 세상을 떠난 뒤로 소주병을 쥐었다. 가슴에 박힌 자식 얼굴이 떠오를 때마다 할머니는 그리움을 소주로 삼켰다. 소주는 약, 약주가 됐다.
엄마는 술에 취해 흐트러진 할머니가 싫었다. '은정이가 떴다'하면 동네 할머니들끼리 모여 벌여진 술판은 이내 끝났다.
눈만 감으면 그려지던 아들 얼굴처럼 쫑알대던 손녀들도 아른거렸을 테다. 시끄러운 티브이 소리만 울려대던 홀로 앉은 깜깜한 방. 약주 한잔 걸친 저녁. 5분도 채 되지 않은 전화 통화. 전화기 선 넘어 손녀 목소리가 할머니 등이라도 어루만져줬을까.
'내 사랑 외할매' 주머니 속 휴대폰 진동이 울린다. 할머니다. 아르바이트를 끝내고 터덜터덜 집으로 가는 길이었다. 마트 계산원 아르바이트하던 날. 꼭 하나씩 나타나는 진상 손님 때문에 힘이 빠졌다.
"응, 할매~"
매번 '할머니한테 오늘은 전화해야지.' 생각만 하다가 뒤돌아서면 잊다가 할머니 전화를 받고서야 '아차' 싶다. 애써 목소리 톤을 한 톤 높여 할머니를 불렀다.
"린아, 사람은 착하게 살아야 복받는데이. 예린이 하이팅!"
언제나 같은 마무리로 끝나는 통화인데 목구멍이 따끔해지고 눈물이 고였다. 침 한 번 꼴깍 삼키고 눈물을 꾹 눌러 담았다.
"응, 할머니 내가 다음 달에 놀러 갈게. 사랑해."
위로받으려 위로하는 날. 초여름 밤하늘 북두칠성이 유독 반짝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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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직 시골기자이자 두 아이 엄마. 막연히 글 쓰는 일을 하고 싶었다.시간이 쌓여 글짓는 사람이 됐다. '엄마'가 아닌 '김예린' 이름 석자로 숨쉬기 위해, 아이들이 잠들 때 짬짬이 글을 짓고, 쌓아 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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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을 잃은 그 후... 할머니는 소주잔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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