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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대전화 알람이 울렸다. 알람을 끄고 폰을 들여다본 시간은 아침 6시 20분. 늘 같은 시간이다. 침대에서 몸을 빼 출근 준비를 시작했다. 씻고, 아침을 먹으며 TV를 켠다. 출근을 준비하면서 아침 뉴스를 보는 것은 자연스러운 하루의 루틴이다. 아내는 평소와 같이 주방에서 내 도시락을 싸고 있다. 마침 TV에서 흘러나오는 일기예보.
'오늘 저녁에 중부지방은 많은 눈이 내릴 예정입니다. 퇴근길 안전 운행하세요.'
올해 유난히 잦은 눈 소식. 오늘도 눈이 온다고 한다. 작년 겨울에는 그렇게 가물더니 올해는 눈 풍년이다. 코로나만 아니었으면 눈 오는 날은 딱 데이트 각이다 싶은데 아무래도 시기가 시기이다 보니 올겨울 눈 오는 풍경을 보는 곳은 주로 우리 집 베란다였던 것 같다. 일기예보가 끝나고, 서둘러 출근 준비를 한 나는 가방을 메고 현관을 나선다. 신발을 신는 나에게 아내가 한마디 했다.
"눈 많이 온다니까 우산 잘 챙겨가요."
"네, 안 그래도 가방에 우산 넣었어요. 다녀올게요."
그렇게 출근길을 나서며 지하철역으로 가는 길. 아직 어슴푸레한 어둠이 가시지 않아 출근길은 어두웠다. 그래도 밤이 많이 짧아졌는지 동쪽 하늘 끝에는 어둠이 조금씩 걷히고 붉은 기운이 보이기 시작했다. 서둘러 옮기던 발걸음에 잠시 든 생각은, 하늘이 많이 흐리지 않았는데 '정말 눈이 많이 올까'였다. 마치 눈을 기다리던 어릴 때 나처럼. 하지만 그런 생각도 잠시였고 그렇게 오늘도 총성 없는 전쟁 같은 일상으로 난 한 발 한 발 들어서고 있었다.
정신없이 하루 일과가 지나고, 서둘러 나온 퇴근길. 쏟아부을 것 같은 눈은 아직까지 소식이 없었고, 아침까지 조금 설렜던 마음은 힘든 하루 일상을 보낸 내게 잠깐의 신기루같이 머물렀던 잔상처럼 이미 흩어지고, 사라진 듯했다.
지친 몸을 흔들리는 지하철에 맡겼고, 사람들 물결 속에 내 몸도 이리저리 흔들거렸다. 달리는 열차도 퇴근하는 사람들처럼 힘겹고 지쳐 보였다. 어느새 지하철은 지하 구간을 지나 지상으로 올라왔고, 잠시 멈춰 선 낯선 역 플랫폼 밖으로 하얀 무언가가 떨어지는 게 눈에 들어왔다.
'눈이다.'
지쳐서 생기가 흩어졌던 나는 갑자기 떨어졌던 텐션이 올랐고, 달리던 지하철에서 서둘러 내려 내리는 눈을 보고 싶은 충동에 읽던 책도 잠시 접었다. 그렇게 조금은 긴장되고, 조금은 설렌 감정으로 퇴근 지하철 선로를 달리던 열차는 어느새 내가 내려야 할 역에 정차했다.
서둘러 내려서 역사를 빠져나오는 날 반긴 건 바로 솜뭉치처럼 하늘에서 쏟아붓는 하얀 눈이었다. 하얗게 하늘에서 눈이 내리는 모습에 가방에 있는 우산을 꺼낼까 싶다가 갑자기 눈을 맞고 싶다는 생각에 난 발걸음을 역사 밖으로 서둘러 내디뎠다. 얼마 만에 우산 없이 맞는 눈인가 싶었다.
집까지 가는 길에 차곡차곡 쌓이던 눈은 어느새 세상을 조금씩 하얗게 가두기 시작했고, 아파트 숲 속 조용히 빛나는 주홍색 조명 빛은 눈에 반사되어 어두운 아파트 구석구석을 환하게 비추기 시작했다. 집에 들어선 난 아내와 딸아이에게 눈이 많이 온다고 얘기했고, 아내와 난 아들이 학원 마치고 돌아올 시간에 맞춰 밖에 나가 눈사람을 만들기로 의기투합했다.
오는 눈이 그칠까 걱정스러운 마음에 늘 이 시간이면 내렸던 베란다 블라인드도 저녁 내내 그대로 뒀다. 다행히 하얗게 내리는 눈은 그칠 기미 없이 늦은 밤까지 내렸고, 아들이 학원을 마치고 올 시간에 맞춰 아내와 난 서둘러 채비를 하고 집 밖으로 나갔다.
마지막까지 귀찮다고 하던 딸아이까지 집 밖으로 나와 우린 그날 밤 눈 오는 겨울의 정취를 제대로 느꼈다. 아내와 난 눈사람을 나눠서 만들기 시작했고, 미리 눈사람 재료를 준비하지 못한 탓에 못생긴 '녀석'으로 탄생은 했지만 올겨울 첫 눈사람을 완성하고서 기념샷까지 찍었다.
내리는 눈으로 대부분의 차들이 지하 주차장으로 들어가서인지 집 앞 아파트 광장은 차들이 거의 없었고, 다니는 사람도 없어서 눈 위에는 우리 발자국만이 사람이 지나간 흔적을 남겼다. 한쪽에서 눈을 굴리는 딸아이를 보다가 난 갑자기 장난기가 발동했다.
"지수야, 여기 눈 폭탄이다. 받아라!"
"어머, 어머~, 아버님 저랑 한번 제대로 붙어보시겠다는 건가요. 그럼 저도 갑니다~"
"아하하, 쏘리. 난 정말 맞을지 몰랐지."
그렇게 떠들며 놀았더니 늦은 시간이라고 아내가 주의를 줬고, 한참 끌어올렸던 텐션을 조금은 누그러트리며 우린 내리는 눈을 감상했다. 그때 갑자기 우리에게 다가온 한 남학생이 있었고, 그 남학생은 조용히 몇 마디를 하고서는 조용히 아파트로 들어갔다.
"이 시간에 뭐해요? 아빠."
"어? 어, 아들. 아들 올 시간 맞춰 나와서 아들 기다리고 있지. 아들, 우리 눈싸움 하자"
"네? 추워요. 저 할 게 많아서 먼저 들어갈게요."
그렇게 낭만이라고는 '1도' 없는 배신자(?) 아들은 일초의 망설임도 없이 집으로 들어가 버렸다. 눈 오던 밤은 그렇게 조용히 깊어갔다. 아들이 집으로 들어간 바람에 우리도 아쉬웠던 눈 장난을 마무리하고 집으로 들어갔다.
살아가는 모든 하루가 오늘만 같을 수는 없겠지만, 가족이 있어서 피곤했던 하루가 행복으로 마감되고, 피로했던 일상이 아이들과 아내의 웃음으로 회복되었다. 오늘도 난 그렇게 치유하고, 회복했고 그리고 내일을 또 힘차게 살아갈 힘을 채웠다. 내가 설렌 건 눈이 아니라 내리는 눈을 함께 즐길 가족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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