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돌을 나르는 제물포고 학생들제물포고 초대 교장 길영희는 흐르는 땀만이 나라를 번영케 한다는 ‘유한흥국’(流汗興國)을 강조했다. 학교 건물을 지을 때도 길 교장은 솔선수범했다. 교장 뿐 아니라 교사, 학생들까지 모두 학교를 세우는 데 함께 했다. 제물포고등학교 도서관도 그렇게 완공되었다. 교장부터 학생까지 피땀으로 지은 도서관이다.
인중제고총동창회
제물포고등학교 탄생에 결정적 역할을 한 길영희는 교장 재직 시절부터 유명했다. 1950년대 교육계는 금권과 부정이 판을 쳤다. 길영희는 오직 성적만으로 학생을 뽑았다. 비리와 타협하지 않고 올곧은 길을 걸었다.
인천 시민과 학생은 그런 길 교장을 '돌대가리'라는 애칭으로 불렀다. '돌대가리'라고 불리자 길 교장은 자신을 '석두(石頭)' 선생이라 칭하며 웃어넘겼다. 교내에서 모르는 학생을 만나면 이름을 물어 외웠다. 길 교장이 학생 사진과 이름이 적힌 종이를 책상에 두고 학생 이름을 외워 불렀다는 일화도 전한다.
길영희는 1900년 11월 30일 평안북도 희천군 희천면 읍상동 92번지에서 태어났다. 1914년 희천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한 그는 1918년 평양고등보통학교(평고)를 졸업했다. 1918년 4월 길영희는 의사가 되기 위해 경성의학전문학교(경의전)에 입학했다. 경의전 시절 학생대표로 3·1 운동에 참여한 길영희는 퇴학을 당했다. 의사의 길이 막힌 길영희는 이후 교육자의 길을 걸었다.
경의전 출신으로 3·1 운동에 참여한 인물 중에 한위건(韓偉健)과 백인제(白麟濟)가 있다. 한위건은 상하이 임시정부에 참여했다가 공산주의자의 길을 걸었다. 한위건은 <아리랑>의 주인공 김산과 '악연'으로 얽힌 인물이다. 백인제는 의사의 길을 계속 걸어 최고의 외과 의사가 되었다.
1919년 3월 1일 경찰에 체포된 길영희는 1920년 2월 만기 출소했다. 감옥에서 나온 길영희는 1923년 8월 배재고등보통학교에 편입해서 수석으로 졸업했다. 졸업 후 일본으로 건너간 그는 히로시마고등사범학교(廣島高等師範學校) 역사학과에 입학했다. 히로시마고등사범은 도쿄고등사범학교와 함께 일본에서도 입학하기 어려운 학교로 꼽혔다. 히로시마고등사범 학생 정원은 700명밖에 되지 않았다. 1919년부터 1938년까지 이 학교를 졸업한 조선인은 35명에 불과했다.
히로시마고등사범 시절 길영희는 수업 시간 외에는 도서관에서 공부에 집중했다. 이 과정에서 그는 '도서관'의 중요성을 깨닫지 않았나 싶다. 길영희가 졸업한 평양고등보통학교와 경성의학전문학교의 일제강점기 건물 설계도가 남아 있다. 히로시마고등사범을 포함해 그가 거친 학교에는 모두 '도서실'(圖書室)이 있었다.
조선교육회 장학생이었던 길영희는 장학금을 모아두었다가, 조선인 노동자에게 나눠줬다. 유학 중에 함께 공부하던 조선인 동기가 갑자기 숨지는 일이 생겼다. 길영희는 이역 땅에서 숨진 조선인 학생의 장례를 앞장서서 치렀다. 대한민국 1호 사서이자 히로시마고등사범 후배 이규동의 회고다.
일제강점기 그가 농촌 계몽 운동을 펼친 이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