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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 익산으로 유배

[[김삼웅의 인물열전] 호방한 자유인 허균 평전 / 23회] 그동안 파직과 탄핵을 당했으나 마흔 셋에 유배는 처음이다

등록 2021.03.24 17:46수정 2021.03.24 17: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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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열향교 함열관아는 모두 헐려 사라지고 600여 년 전에 문 연 향교만 남아 함라를 빛내고 있다 ⓒ 김정봉

 
의금부에 갇혔던 허균은 1611년 1월 15일 전라도 함열로 유배되었다. 지금 전북 익산이다. 어느덧 마흔세 살의 중년이 되었다. 그동안 파직과 탄핵을 당했으나 유배는 처음이다. 

은근히 귀양지가 북부나 동부가 아닌 전라도 익산(함열)으로 결정된 데 감사했을지 모른다. '플라토닉 러브'의 매창이 사는 부안과 가까운 곳이 아닌가. 또 그동안 낡은 인습에 젖은 관리들 사이에서 속물처럼 살아오다가 마침내 해방감을 느꼈을 터이다. 함열에서 지은 시가 심경을 말해준다.

             좋구나 유배살이

 번요한 인생살이 한가한 날 없더니, 
 유배 와서야 세상사 끊고 기쁨 얻었네.
 푸른 대나무는 아지랑이 머금어 봄 풍경 단장하고
 복숭아는 찬비 맞아 한낮 기운 서늘하네.
 완부(阮孚, 동진 때 사람)가 나막신 좋아하던 일 분명히 알겠으니
 공우(貢禹, 벼슬을 거부한 한나라 사람)에게 갓을 털게 할 것 없네.
 감호(강릉 경포호) 맑은 물에 배 띄울 만하거늘
 언제나 돌아가 낚싯대 드리울까. (주석 1)


허균에게 유배는 '자기해방'의 방편이었다.
입신과 명예를 떨구고 자유로운 영혼이 되었을 때, 몇 해 전에 벗이던 화가 이정(李楨, 1578~1607)이 그려준 도연명ㆍ이백ㆍ소동파 세 시인의 초상화를 방안에 내걸었다. 좋아하는 시인이란 것을 알고 그가 그려주었던 것이다.

이정은 할아버지ㆍ아버지ㆍ작은아버지가 모두 이름난 화원이었다. 그 시대 화원(화가)은 중인계급이어서 관직에 들기 어려웠다. 이정은 10대에 이미 산수ㆍ인물ㆍ불화를 잘 그려서 널리 알려지고, 신분을 따지지 않는 허균과는 절친이었다. 그런데 젊은 나이에 너무 일찍 세상을 떴다. 
  

함라 어린이 집 어린이집 일대가 함열관아였고 허균 유배지는 함열관아에서 얼마 안 떨어진 현 ‘함라어린이집’으로 알려지고 있으나 그 흔적은 찾을 길이 없다 ⓒ 김정봉

 
비좁은 방에 '사우재기(四友齋記)'란 당호를 걸었다. '사우'란 이정이 그려준 세 인물에 자신을 포함시킨 것이다. "네 벗이 함께하는 집"이란 뜻의 「사우재기」를 지었는데, 다음은  글의 앞 부문이다.

집에다가 '사우(四友)'라고 이름지은 까닭은 무엇인가. 허자(許子, 허균의 자칭)가 벗으로 삼은 이가 셋이며 허자가 또한 그 하나에 해당하니, 이를 아울러 네 벗이라고 하였다. 그 세 사람은 누구인가. 요즘의 선비가 아니라 옛날의 사람이다. 


허자의 성품이 허탄해서 세상과 어울리지를 못했으므로, 같은 시대의 무리들은 그를 꾸짖었으며 많은 사람들이 그를 배척하였다. 문에는 찾아오는 사람도 없었으며, 밖에 나가도 찾아갈 곳이 없었다. 그래서 슬프게 탄식하며 말했다.

"붕우(朋友)란 오륜 가운데 하나인데도, 나만 혼자 벗이 없다. 이 어찌 매우 부끄러운 일이 아니겠는가."


그리고는 돌아와서 생각해 보았다.

"온 세상이 나를 더럽게 여기며, 나와 사귀지 않는다. 어디에 가서 벗을 구할 것인가. 어쩔 도리가 없으니, 옛 사람 가운데서 사귈 만한 사람을 골라, 그와 벗삼으리라." (주석 2)


그의 본업은 문사라 할 것이다. 글을 쓰고 책을 엮은 일이 체질화되었다. 공직에 있을 때도 짬을 내어 글 쓰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 이제 신분은 비록 유배자이지만 감시자가 따로 없는 자유로운 처지에 있었다. 그런데 다시 신상에 변화가 있었다. 이듬해(1611년) 11월에 유배가 풀렸다. 서울의 집에 잠시 들렸다가 매창이 사는 부안으로 거처를 옮겼다. 

함열에서부터 시작한 『성소부부고』를 엮는데 정성을 다하였다. 그동안 지은 시와 산문들을 모아 시부(詩部)ㆍ부부(賦部)ㆍ문부(文部)ㆍ설부(說部) 등 4부로 나누어 64권을 정리하였다. 책명을 '부부고(覆瓿藁)'라 이름 지은 것은 황무한 것이 너무 많아 취할 것이 못되고 장독이나 덮는 것 밖에 될 수 없기 때문이며, 글이 일가를 이루지 못했으므로 후세에까지 전할 것이 되지 못해 집(集)이라 하지 않고 고(藁)라 한다고 했다. 지극히 겸양한 표현이다. 

얼마 후에 그가 역적의 괴수로 극형을 받았기 때문에 이 문집은 공간할 수 없었고 후대에 몰래 필사하여 전해지면서 오자낙서가 적지 않았다. 1711년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에서 처음으로 영인하여 세상에 소개되었다. 

마흔 네 살이 되는 1612년은 그에게 견디기 어려운 아픔이 따랐다. 맏형 허성이 64세로 눈을 감았다. 일찍이 문과에 급제하고 통신사의 서장관으로 일본에 다녀와서 토요토미의 조선침략을 내다봤던 통찰력을 보이고, 대사성ㆍ대사간을 거쳐 예조ㆍ병조ㆍ이조판서를 두루 지낸 조정의 원로였다. 허균이 그나마 명줄이라도 부지할 수 있었던 데는 맏형의 그늘이었다고 할 것이다.

그 즈음 석주 권필이 유명을 달리하였다. 뜻이 맞은 오랜 지우였다. 귀양을 가다가 폭음으로 숨졌다고 한다. 허균은 벗의 죽음을 애도하는 추도시를 지었다.

            권 필

 석주는 천하에 으뜸가는 선비라
 그 재주는 임금을 도울 만했는데, 
 포부를 제대로 펴지도 못한 채
 가난 속에 파묻혀 굶주리길 즐겼어라.
 시를 지으면 하늘을 꿰뚫었으니
 뛰어난 그 솜씨 그 뉘라서 화답하려나.
 왕유ㆍ맹호연 의당 뒤에 있어야 하고
 안연지ㆍ사영운도 또한 웃자릴 비워야지.
 창과 칼에 번개 서리 늘어 놓은 데서
 구슬 같은 글조각들 흩떨어지네. 
 오늘에 이르러 마흔 살 사내건만
 거칠은 흙탕길에 늘 헤매었지.
 평생토록 가깝게 사귀었다고,
 내 잘못쯤은 풍류라고 눈 감아 줬지.
 한유ㆍ맹교쯤이야 겨우 거봉벌레지
 두 시인이 크다고야 감히 말할까?
 깨우쳐 주는 시구들 때때로 만나면
 간담이 서늘해짐을 먼저 깨닫네.
 자연으로 돌아가자던 우리의 본래 기약
 결단 못하는 나야말로 정말 겁쟁이여라. (주석 3)


주석
1> 정길수, 앞의 책, 75쪽.
2> 허경진, 『홍길동전ㆍ허균산문집』, 64쪽.
3> 허경진, 『교산 허균시선』, 127쪽.

 
덧붙이는 글 <[김삼웅의 인물열전] 호방한 자유인 허균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허균 #허균평전 #자유인_허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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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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