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장에 길들여진 연기자들"주식시장"이란 드라마의 끝 간 데 없는 막장의 효과
남희한
이 드라마가 특이한 것은 누구나 배우로 참여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이 초대형 드라마에선 한 나라의 대통령도 평범한 어린 아이도 배우로 맹활약할 수 있다. 가끔은 대통령의 스캔들이 전 세계 주가를 들썩이게 만들고, 평범한 한 사람의 묵직한 발언이 큰 파장을 일으켜 새로운 국면을 만들기도 한다.
나 역시 이 드라마에서 지나가는 행인 534892567번 역을 맡아 맹활약 중이다. 이게 아주 세심한 메소드 연기라 눈에 잘 띄진 않지만, 주식시장에서 절대 없어선 안 될 개미의 역할을 착실히 해나가고 있다.
쪽대본과 발 연기
쪽대본은 다양한 방식으로 날아든다. 트위터, 외신, 유튜브, 증권사 리포트, 증권가 찌라시, 옆 사람의 혼잣말, 그 옆 사람의 탄식 등 그 형태와 종류가 천차만별이다. 일일이 대응하는 것이 쉽지 않다. 이를 받아 든 사람마다 하는 행동도 모두 달라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분명하지 않다. 게다가 언제 어디서 날아올지도 알 수 없는 그 타이밍에 어려움은 더욱 커진다.
그래서인지 이곳에는 실시간 연기 지도자도 있다. 주식 전문가라는 사람이나 퀀트라는 주식 알고리즘 등이 그것인데, 각각의 쪽대본에 어떤 식으로 리액션을 취하면 좋은 연기로 거듭날 수 있는지를 앞 다투어 제공한다. 참으로 고마운 지도 편달이다. 그런데 문제는 어설픈 흉내내기가 연기를 발로 하게 만든다는 사실이다. 안 그래도 어설픈데 더 이상 봐 줄 수 없는 지경에 이르기도 한다. 이론과 실제의 간극이 큰 세계다.
다른 나라 대통령의 트위터 한 방에 주식 계좌가 녹아내리면, 적당한 비명을 지르며 어디선가 물을 길러와 계좌에 들이 붓는다. 이상한 전개다. 아침에 발간된 종목 리포트에 해당 기업의 주가가 꿈틀대기라도 하면, 초초한 마음으로 매수버튼을 누를지 말지를 햄릿의 한 장면처럼 연출한다.
"To buy, not to buy. 살지 말지 그것이 문제로다."
비극이라기엔 장르가 애매하다. 이런 연기 사이사이에 '진작 팔 걸'과 '그때 샀어야 했는데'라는 독백 연기는 필수다. 이 바닥에서 이 연기만큼은 누구나 수준급이다. 역할에 지나치게 심취했더랬다.
주식 초보답게 허황된 꿈을 꾸는 개미 4359803번도 되어 보고 비자발적 장기투자 개미 1283043번도 돼봤다. 매 순간 날아드는 쪽대본을 어떻게든 소화해보려던 노력이 만든 역할변화였다. 누가 지시한 것도 아닌데, 때마다 "이번만은 반드시"라며 연기에 몰두했다. 그땐, 그게 최선이고 더 잘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 생각했다.
결과적으로 마냥 최선을 다했던 것이 오히려 독이 되었다. 시시각각 들려오는 소식에 착실히 흔들렸고 그 흔들림에 많은 것을 떨어뜨렸다. "그 후로 개미는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습니다"라는 결말을 바라며 참여한 드라마에서 우여곡절을 만들어내며 겪었다. 당연하게도, 만만하게 봤던 '천의 얼굴'은 고사하고 마음만 앞선 발 연기만 남발했다.
연기 변신
'주식시장'이란 드라마에선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몰랐다. 뭐라도 해보려고 이리저리 뛰어 다녔는데, 남은 거라곤 한껏 꺼져버린 기대와 움푹 파여 버린 다짐뿐이었다. 멋진 연기를 선보이고 싶었는데, 발 연기라 그런지 도저히 감당할 수 없었다.
이 희대의 막장 드라마는 누구 하나가 연기를 그만두어도 보란 듯이 흘러간다. 영혼을 끌어 모아 최선을 다하든, 적당히 눈치껏 흉내만 내든 상관하지 않는다. 게다가 연기자 스스로가 장르와 포지션도 정한다.
누군가는 인생 한 방을 꿈꾸는 극적인 인물로, 누군가는 소소한 일상을 영위하는 심심한 인물로 열연한다. 그러다 한 순간 장르와 포지션을 바꾸기도 하는데, 그래도 이야기는 흘러간다. '막장'이 가지는 엄청난 유연함이다.
그래서 나도 연기 변신을 시도했다. 감당할 수 없는 빠른 호흡과 묵직한 긴장감을 소화하기보단 조금은 느리고 답답해도 느긋한 한량으로 거듭나려 노력했다. 대단한 변신이 아님에도 이를 위한 과정은 만만치 않았다.
온갖 소식과 주가의 변동을 한량처럼 대하기 위해선 주식 비중을 대폭 줄여야 했다. 쉬운 일이 아니었다. 수익과 손실을 확정 짓는 일은 막 끊인 남의 라면을 한입만 먹거나, 내 라면을 한입 빼앗기는 것처럼 아쉬움이 남는 일이다.
그런 내 연기 변신은 사뭇 심심하다. 직장을 다니고 육아를 하고 아침저녁 짬짬이 주식창을 들여다본다. 떨어지면 떨어졌구나, 오르면 올랐구나. 여전히 독백 연기엔 충실하지만 주식에서 만큼은 한량이기에 동요하지 않으려 애쓰고 있다. 다행히 이 밋밋한 리액션에도 주식시장은 별다른 지적을 하지 않는다. 그저 그런 배우로 나를 인정해준다.
가까운 누군가는 그런 식으로 연기하면 안 된다며 액션물도 하고 스릴러물도 다시(?) 해야 한다고 하지만, 다행히 아직까진 현역으로 활동 중이다. 이게 잘 하고 있는 일인지는 한참이 지나서야 알게 될 테지만, 이전보다 편안해진 지금에 제법 만족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