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릉시 사천면 사천진리 하평마을, 교산 언덕에 1983년에 세운 허균 시비. 한시 '누실명'이 새겨져 있다.
장호철
그는 출사ㆍ파면ㆍ투옥ㆍ유배ㆍ해외사절 등 끊임없는 곡절 속에서도 많은 시와 논설ㆍ산문에 이어 소설까지 지었다. 참혹한 죽임과 왕조멸망 때까지 사면이 되지 못함으로써 인멸된 글이 없지 않지만 전해지는 글도 적지 않다. 산문과 논설 중에는 500년의 시차를 뛰어넘어 살아 숨쉬는 현재성에 이르는 글도 있다.
우선 그는 책 욕심이 많았다.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을 때 노자를 몽땅 털어 책을 사고, 값이 모자라서 수종하는 하인들에게 빌려 책값을 지불했다고 한다. 1616년 1월 연경에서 쓴 「책 욕심 비웃지 말라」이다.
책 욕심 비웃지 말라
여러 해 연이어 중국 가는 길 비록 힘들지만
옛사람 책 많이 얻어 오는 즐거움 있네
가진 것 죄다 털어 책 산다고 비웃지 마오
나는 장차 책벌레가 되려고 하니.
고향집 왜란 겪고 고서를 다 잃어
세상에서 보지 못한 책 얻고 싶을 뿐
여기 와 산 책이 몇 만 권이니
등불 아래서 글 읽을 만하네. (주석 1)
그의 글쓰기 기본은 자주정신이었다. 유학자들이 당ㆍ송ㆍ명의 명시들을 습작하느라 아류의식에서 허우적일 때 독창성을 제창하였다. 그는 조선의 문인들이 중국 문사들의 글을 모방하고 표절하는 짓을 질타하였다. 「문설(文說)」의 한 대목이다.
당신은 저 몇 문장을 자세히 읽지 않았습니까? 좌씨는 그대로 좌씨이고, 장자는 그대로 장자이며, 사마천과 반고는 그대로 사마천과 반고이고, 한유와 유종원과 구양수와 소동파는 그대로 한유와 유종원과 구양수와 소동파여서, 이분들은 남을 그대로 모방하지 않고 저마다 일가를 이루었습니다. 제 소원은 이런 점을 배우는 것입니다. 남의 집 아래 집을 짓고 표절한다는 꾸지람 듣는 일을 저는 부끄러워합니다. (주석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