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세에 결혼해 86세에 등단하고 90세에 첫 시집을 발간한 정봉애 시인(92)
최육상
"낮에 길 가시는 모습을 뵈었는데, 제가 바빠서 인사를 못 드렸어요. 죄송해서 전화를 드렸어요."
"아, 그랬어. 그러면 맴매 맞아야지, 맴매. 워쩌것어. 하하하."
"그래서 국수 사 드리려고요. 국수에 막걸리 한 잔 어떠세요?"
"국수하고 막걸리? 좋제. 헤헤헤."
지난달 29일 오후 6시가 조금 넘은 시각. 지인은 한 어르신에게 전화를 드렸다. 갑작스러운 만남이 이뤄졌다.
주인공은 16세에 결혼해 86세에 등단하고 90세에 첫 시집을 발간한 정봉애 시인. 올해 92세인 시인이 건넨 명함은 멋졌다.
인생 구순에 첫 시집 〈잊지 못하리〉
앞면에는 '인생 구순에 첫 시집 〈잊지 못하리〉, 성원 정봉애 시인'이라고 쓰여 있다. 뒷면은 더 인상적이다.
"별빛이 익어가는 고요 속에 / 벽시계는 자정을 부르는데 / 오지 않은 잠 찾으러 헤매니 / 그 누구의 탓이런가 / 달빛마저 저리 차가우면 / 어찌하라는 건가"
감성을 자극하는 시 아래에는 살아온 이력이 담겨 있다. 1929년 남원 출생. 1943년 광산 사립학교 졸업. 1944년 결혼. 2014년 월간 문학공간 신인상 수상 등단. 2018년 전북문인협회 문학활동 공로상 수상.
첫 만남에 막걸리와 국수라니. 지인에게는 미안했지만, 술자리를 핑계 삼아 취재를 시작했다. 대화는 은근슬쩍 내가 방향을 잡아 여쭈면, 시인이 소녀다운 감성으로 살아온 이야기를 풀어냈다.
국수에 앞서 미니족발이 먼저 나왔다. 시인과 건배하며 순창막걸리를 한 잔 들이켰다. 열여섯 살 결혼이야기부터 여쭸다.
"내가 학교 성적도 좋고 한 게, (우리 집이) 먹을 만치 살았거든요. 오빠가 아부지한테 봉애 상급 학교 보낸다고 그랬다가 혼났어요. 그때 '큰애기 공출'이라고 일본 놈들이 어린 처자들 잡아가는데 그놈들한테 뺏긴다고, 아홉 살에 학교 들어가서 열다섯에 졸업한 나를 시집보냈어요. 그때가 열여섯이야."
방금 전 오판동(100) 어르신을 뵙고 오던 차, 100세 어르신 사진을 보여드렸다.
"이 할아버지가 백 살이에요."
"백 살? 우와~."
"여덟 살 오빤데 뭐가 우와에요?"
"헤헤헤, 이 할아버지는 흙하고 사니까 건강해 보이시네."
"내가 시아부지한테 술 배웠당게"
평소에 막걸리를 즐겨 드신다는 정 시인에게 언제 처음 막걸리를 드셨느냐고 여쭸다. 뜻밖의 답이 나왔다.
"내가 막 결혼해서 새 애기, 각시여. 근디 시아부지가 '아가, 막걸리 한 잔 혀라'고 권하시는 거여. '부끄러워서 술 못혀요' 마다했는데, 자꾸 한 잔만 받아보라고 하셔서 내가 시아부지한테 술 배웠당게. 헤헤헤."
막걸리 한 잔을 비우자 정 시인은 진짜 '소녀 감성'을 드러냈다. 천생 시인이었다. 살짝 오른 취기로 자연스레 시를 읊었다.
"어저께 쓴 시가 있어요. 제일 마지막에 '해가 저물면~ 철없이~ 또 누구를~ 기다리는지', 이 대목 괜찮죠?"
"네. 좋은데요."
"좋아? 헤헤헤. 근디 나이가 들어서 근가, 이제 '시심'이 잘 안 나와."
정 시인은 아들 다섯에 딸 둘, 칠 남매를 두었다. 큰딸은 스무 살에 낳아서 지금 일흔두 살이고, 서른다섯에 낳은 막내는 토끼띠(1963년생) 쉰일곱 살이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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