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녀 감성으로 시를 쓰는 92세 시인

[인터뷰] 구순에 첫 시집 낸 정봉애 시인

등록 2021.05.07 08:38수정 2021.05.07 0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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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세에 결혼해 86세에 등단하고 90세에 첫 시집을 발간한 정봉애 시인(92) ⓒ 최육상

   
"낮에 길 가시는 모습을 뵈었는데, 제가 바빠서 인사를 못 드렸어요. 죄송해서 전화를 드렸어요."
"아, 그랬어. 그러면 맴매 맞아야지, 맴매. 워쩌것어. 하하하."
"그래서 국수 사 드리려고요. 국수에 막걸리 한 잔 어떠세요?"
"국수하고 막걸리? 좋제. 헤헤헤."



지난달 29일 오후 6시가 조금 넘은 시각. 지인은 한 어르신에게 전화를 드렸다. 갑작스러운 만남이 이뤄졌다.

주인공은 16세에 결혼해 86세에 등단하고 90세에 첫 시집을 발간한 정봉애 시인. 올해 92세인 시인이 건넨 명함은 멋졌다.

인생 구순에 첫 시집 〈잊지 못하리〉

앞면에는 '인생 구순에 첫 시집 〈잊지 못하리〉, 성원 정봉애 시인'이라고 쓰여 있다. 뒷면은 더 인상적이다.

"별빛이 익어가는 고요 속에 / 벽시계는 자정을 부르는데 / 오지 않은 잠 찾으러 헤매니 / 그 누구의 탓이런가 / 달빛마저 저리 차가우면 / 어찌하라는 건가"


감성을 자극하는 시 아래에는 살아온 이력이 담겨 있다. 1929년 남원 출생. 1943년 광산 사립학교 졸업. 1944년 결혼. 2014년 월간 문학공간 신인상 수상 등단. 2018년 전북문인협회 문학활동 공로상 수상.

첫 만남에 막걸리와 국수라니. 지인에게는 미안했지만, 술자리를 핑계 삼아 취재를 시작했다. 대화는 은근슬쩍 내가 방향을 잡아 여쭈면, 시인이 소녀다운 감성으로 살아온 이야기를 풀어냈다.

국수에 앞서 미니족발이 먼저 나왔다. 시인과 건배하며 순창막걸리를 한 잔 들이켰다. 열여섯 살 결혼이야기부터 여쭸다.

"내가 학교 성적도 좋고 한 게, (우리 집이) 먹을 만치 살았거든요. 오빠가 아부지한테 봉애 상급 학교 보낸다고 그랬다가 혼났어요. 그때 '큰애기 공출'이라고 일본 놈들이 어린 처자들 잡아가는데 그놈들한테 뺏긴다고, 아홉 살에 학교 들어가서 열다섯에 졸업한 나를 시집보냈어요. 그때가 열여섯이야."

방금 전 오판동(100) 어르신을 뵙고 오던 차, 100세 어르신 사진을 보여드렸다.

"이 할아버지가 백 살이에요."
"백 살? 우와~."
"여덟 살 오빤데 뭐가 우와에요?"
"헤헤헤, 이 할아버지는 흙하고 사니까 건강해 보이시네."


"내가 시아부지한테 술 배웠당게"
 

평소에 막걸리를 즐겨 드신다는 정 시인에게 언제 처음 막걸리를 드셨느냐고 여쭸다. 뜻밖의 답이 나왔다.

"내가 막 결혼해서 새 애기, 각시여. 근디 시아부지가 '아가, 막걸리 한 잔 혀라'고 권하시는 거여. '부끄러워서 술 못혀요' 마다했는데, 자꾸 한 잔만 받아보라고 하셔서 내가 시아부지한테 술 배웠당게. 헤헤헤."
 

막걸리 한 잔을 비우자 정 시인은 진짜 '소녀 감성'을 드러냈다. 천생 시인이었다. 살짝 오른 취기로 자연스레 시를 읊었다.

"어저께 쓴 시가 있어요. 제일 마지막에 '해가 저물면~ 철없이~ 또 누구를~ 기다리는지', 이 대목 괜찮죠?"
"네. 좋은데요."
"좋아? 헤헤헤. 근디 나이가 들어서 근가, 이제 '시심'이 잘 안 나와."


정 시인은 아들 다섯에 딸 둘, 칠 남매를 두었다. 큰딸은 스무 살에 낳아서 지금 일흔두 살이고, 서른다섯에 낳은 막내는 토끼띠(1963년생) 쉰일곱 살이란다.

여든 무렵 컴퓨터 배운 '꽃바구니'
 

지금도 시 공부와 함께 서예 공부도 하고 있는 정봉애(92) 시인 ⓒ 최육상

   
정 시인은 코로나로 지난해에는 잠시 멈추기도 했지만, 월·수요일에는 서예를 공부하고, 목요일에는 시 공부 모임을 하고 있다. 2008년에는 우체국에서 가르쳐줘 컴퓨터도 배웠다. 그때 만든 별명(닉네임)이 '꽃바구니'다. 지인은 정 시인을 '꽃바구니님'으로 불렀다.

여든 무렵 컴퓨터를 배우셨다고 놀라워 하자 정 시인은 "팔십 살이면 내가 젊었을 때네, 헤헤헤" 해맑게 웃었다.

지인은 "(전북) 순창으로 시집온 뒤 뒤늦게 시를 배워 구순에 첫 시집을 펴냈다"면서 "서예도 늦게 배웠는데 잘 하신다"고 말했다. 뭔가 좋아하시는 일이 있으니 맑은 정신과 해맑은 웃음에는 다 이유가 있는 법이다.

정 시인은 어떻게 시를 공부하게 됐을까. 사연은 10여 년 전으로 올라간다.

"바깥양반 돌아가시고 적적하고 우울했어. 〈열린순창〉 신문을 보는데 박재근 그 양반이 글을 잘 쓰더라고. 한 번 만나야겠다고 신문사에 전화를 걸었지. 근디 '문인협회 총회에 오시면 만나실 수 있다'고, '협회 가입하실 거냐'고 물어요. '하죠' 그랬지."

알고 보니, 불순(?)한 의도로 시 공부

두 잔째 막걸리를 비우자 정 시인은 시 공부를 시작하게 됐던 솔직한 마음을 비로소 실토했다.

"나한테 시 공부 모임에 나가보라는 거여. 내 생각에 시라고 하면 정년퇴직한 남자들, 나이 드신 어른들이 시를 허지 하고, 인자 할망구가 헤헤헤, 거기에 가봤어. 문 열고 들어간 게 오~메~ 이쁜 젊은 각시들만 있어. 내 또래 영감님들은 한 명도 없네. 헤헤헤."

정 시인은 "시를 쓰는 게 여전히 어렵다"면서 "아직도 맞춤법은 모른다"고 고개를 저었다.

"책을 많이 읽었어도 요즘말로 시를 쓰려면 어려워요. 일정 때 학교에 조선어 수업이라고 일주일에 한 번인가 들었는데 가르치는 둥 마는 둥 해서 몰라. 학교에서 우리말을 배운 게 없어."

정 시인은 "그동안 쓴 시가 한 백여 편 되는데 이것도 묶어서 해 봐야지"라며 두 번째 시집 발간도 준비하고 있다. 즐거운 대화는 92세 소녀감성을 지닌 시인 특유의 웃음으로 마무리됐다.

"(지인한테) 나를 국수 멕이고 막걸리 마시게 항 게 됐어요? (일동 웃음) 요 며칠 동안 시를 쓴다고 스트레스 받았는데 오늘 풀어 부렀네. 헤헤헤."
덧붙이는 글 전북 순창군 주간신문 <열린순창> 5월 6일 보도된 내용을 수정, 보완했습니다.
#정봉애 #잊지 못하리 #전북 순창 #92세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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