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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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을 먹고 설거지를 하고 있는데, 시어머니와 딸아이가 나누는 대화 소리가 귓속을 파고들었다.
"○○아, 원래 남자는 음식하고 그러는 거 아니야."
"왜?"
"아빠는 회사에서 일을 열심히 하고 오잖아. 힘들었기 때문에 집에 오면 쉬어야 해."
"엄마도 일하는데? 엄마는 우리가 잘 때 집에서 열심히 글 쓰잖아."
"그래도 아빠가 더 힘들어. 그러니까 밥은 엄마한테 해달라고 해."
"아빠는 슈퍼맨이야. 아빠가 만들어 주는 음식도 엄청 맛있어."
"맛있는 건 엄마가 배워서 엄마가 만들어줘야 하는 거야."
한숨이 몰려왔다. 당장 어머님 방에 들어가 말도 안 되는 소리 그만하시라고 소리를 꽥 지르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아이 앞에서 평행선으로 이어지는 말다툼을 또 하고 싶지 않았다. 그건 잘못된 생각이라고 언제든 아이에게 다시 일러주면 되는 일이었다.
시어머니와 합가 6년째지만
세 아이와 시어머니가 한집에 살게 되면서 남편의 요리는 일상이 되었다. 오랜 자취생활로 주부인 나보다 손도 빠르고 아이들이 좋아할 만한 음식을 뚝딱 잘도 만들어낸다.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항상 나보다 먼저 움직여주는 부지런함에 반해 가정을 이룬 지도 8년째. 시어머님과의 합가도 든든한 남편을 믿고 6년째 해오고 있는 중이다.
세 사람의 손발이 척척 맞아떨어진 날도 많았다. 식사 때가 되면 어른 셋 모두가 주방에서 분주하게 움직였다. 요리와 국은 내가 끓이고, 시어머님은 반찬을 꺼내고, 남편은 이것들을 날라 아이들을 먹였다. 각자의 역할을 미리 정한 건 아니었지만, 서로 돕자는 마음이 하나로 모아졌던, 아주 평화로운 날들이었다.
요즘엔 나도 요리 실력과 속도가 많이 나아졌지만, 아이가 셋이 되고 난 후부턴 조금씩 힘에 부칠 때가 많아졌다. 아이들이 밥을 곱게 먹어주면 그나마 다행이다. 입맛에 맞지 않다고 고개를 획획 돌리는 아이들을 어르고 달래서 겨우 먹이고 나면 녹다운 되는 건 시간 문제. 남편과 시어머니의 밥을 차릴 힘은 아예 없다. 그런 내 모습이 언제부터 불만이셨는지, 며느리에게 직접 말은 못 하고 딸아이에게 그런 설교를 하고 계셨던 거다.
시어머님의 불만은 그것뿐만이 아니다. 아파트의 명의가 남편과 나, '공동 명의'인 사실을 알고부터는 갑자기 냉랭해지셨다. 이 세상 핏줄이라곤 아들 하나밖에 없는 자신의 위치가 자꾸 며느리와 세 아이들에게 밀려난다는 느낌을 받으셨던 것. 간밤에 모두가 잠든 새벽, 가족에 집중할 수밖에 없는 아들을 앉혀 놓고 왜 자신의 지분은 하나도 없냐는 설움을 쏟아내셨다.
구슬프게 우는 시어머님의 입장을 모두 이해하진 못했지만 같은 여자로서 처연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뭘까. 결정권도 없고, 남편도 없고, 사는 재미조차 없어져서였을까. 씁쓸한 마음이 한동안 내 마음을 어지럽혔다.
단지 나를 잃지 않으려 한 것뿐인데
"여자가 집에 있어야지, 애는 엄마가 키워야지!"
일을 하러 나가는 동안 시어머니께 숱하게 들었던 말이다. 요즘 같은 세상에도 저런 말을 하시는 어른이 있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다. 아무렇지 않은 척 했지만 가슴 속 한 구석은 오래 따끔거렸고, 그 불만은 그대로 남편에게 전가됐다.
나를 잃지 않으려 했던 노력들이 단지 '여자'라는 이유로 질책으로 이어진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생각에도 없던 '페미니즘'을 검색하기 시작한 건 시어머님께 저런 잔소리를 들을 때부터였다.
그럴 때마다 남편은 더 열심히 나를 도왔다. 그렇지 않은 삶을 살았던 친정엄마와 그 삶을 당연하게 생각하는 친정아버지, 두 분의 관계와 비교하면 훨씬 나은 조건이었다. 하지만 나보다 아이들 간수를 더 잘하는 남편의 불만도 적지 않았다.
"우린 억울해. 지금 우리 세대 아빠들은 과도기에 놓여 있어."
결혼할 당시 '슈퍼맨이 돌아왔다' 아빠 육아 이야기가 한창 인기몰이를 하던 때였다. 할 마음은 없었지만 사회 분위기에 못 이겨 어쩔 수 없이 한다는 소리로 들렸다. 그래서 억울하다고? 그게 억울해 할 일이냐고 말하면 부부싸움으로 번질 것 같아서 그만뒀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어느 날은 나한테 혼나던 아이들이 엄마가 외할머니 집에 한 달이나 있다가 왔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순간 혼나는 게 싫고, 엄마가 미웠던 아이들에게 남편은 차분하게 얘기했다.
"그런 말 하는 거 아니야. 엄마가 없으면 어떡해? 그럼 누가 빨래하고 청소하고 해?"
들고 있던 청소기를 털썩 내려놓으니 눈치가 보였는지 재빨리 수습하는 말을 이어나갔다.
"아니, 아빠도 그건 충분히 할 수 있는데~ 아빠가 회사에서 늦게 올 땐 어떡해? 너희들 돌봐주는 엄마가 있어야지~"
과도기에 놓여있는 남편이 아이들에게 할 수 있는 최선의 회유였다. 안 되는데? 엄마 없인 아빠는 하루도 못 사는데? 너네는 엄마 없이 살 수 있어? 이 정도만 되었어도 웃으면서 넘길 수 있는 문제였다. 아직도 엄마를 기본 양육자쯤으로 여기는 남편과 시어머니랑 함께 사는 나는 앞으로도 헤쳐 나갈 일이 산더미 같아서 뒷골이 지끈거렸다.
남자라고, 여자라고 안 되는 일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