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50년대 우리 아빠의 외할머니 환갑 잔치
노일영
김 주사는 박 영감의 말에 겸연쩍은 듯 뒤통수를 긁적이다 빙긋이 웃으며 누런 수첩을 꺼냈다. 그 당시 농촌 지역에선 세수 확보를 위해 가축 도살에도 세금을 걷었다.
"돼지 한 마리만 잡은 거 맞지요? 다음에 시간 날 쩍에 이장님이 면사무소 오시가꼬 돈 내시믄 되이까네, 저는 이만···."
"아이고야, 우리 김 주사 와이카노! 곧 음식 나오이까네 술이라도 한 잔 묵고 가뿌야지."
이장이 김 주사를 향해 자기 옆으로 오라고 손짓을 하며 말했지만, 평소와 달리 김 주사는 선뜻 상석으로 걸음을 옮기지 않았다. 박 영감과 이장이 옥신각신 실랑이하는 모습을 얼마 동안 지켜본지는 모르겠지만, 분위기가 심상찮음을 파악한 것이리라.
"그 도살비는 아마 바뀐 이장이 내러 갈 끼라요, 김 주사님. 오늘 바로 투표해가꼬 추 이장 저노마를 확 끌어내리뿔 끼이까네. 잔치 시작 전에 투표부터 하입시다. 다들 제 말에 찬성하는 기지요?"
박 영감의 제안에 다들 찬성한다고 고함을 질렀는데, 잔치 음식을 기다리던 꼬맹이들의 목소리가 제일 컸다고 한다.
변심
"박 이장이 쪼매 더 하고 싶다 카이까네 한 1년만 더 하고, 그 뒤에 우리 이사장이 이장을 하믄 안 되겄나. 그게 순리가 아인가 싶다꼬."
머리칼이 온통 새하얀 박 영감의 말이었다. 작업반장과 남편은 휘둥그레진 눈으로 중평댁 옆에 쪼그리고 앉아 있는 박 영감을 동시에 쳐다봤다. 박 이장은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내게 눈웃음을 만들어 보였다. 진짜 잘됐다 싶었다. 농사일에, 육아에, 제멋대로인 철없는 남편에, 협동조합에, 마을기업에···. 이런 상황에서 이장 자리까지 떠맡고 싶지는 않았다.
이장 교체를 의논하기 위한 마을 회의는 박 영감의 말 한마디에 '주민 소환'의 성격에서 점점 박 이장을 재신임 하는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박 이장도 다행스럽고, 나도 만족할 만한 상황이었다. 물론 반장과 남편은 칼에 찔린 카이사르가 브루투스를 쳐다보듯 황망하게 박 영감의 눈을 응시하기만 했다.
"골프 선생질 했다 카고, 대학교꺼정 댕깄다 캐도, 여자는 여자일 뿐인 기라. 여자가 무신 이장을 한다꼬."
"암탉 꽥꽥 집안 폭삭(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 카는 말이 와 있겠노."
"술 처묵는 거 좋아하는 저런 가시나가 우리 이장 되믄, 넘사시러버가꼬(부끄러워서) 다른 동네에 놀러도 몬 간다 아이가."
"이장 단합대회 가가꼬 밖에서 술 묵으믄 어데다 오줌 쌀라꼬?"
"내는 일영이가 이장 되뿌믄 남자 이장 사는 동네로 이사가뿔라 캤다꼬."
슬슬 부아가 치밀고 주먹이 저절로 슬그머니 쥐어졌다. 내가 단지 여자라서 이장을 하면 안 된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리고 나를 더 열 받게 만든 건, 내가 술을 좋아해서 이장 자격이 없다는 거였다.
물론 내가 술을 좀 좋아한다. 귀농해서 제일 좋은 게, 비가 오면 아침부터 술을 까도 흉을 볼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마을 주민 거의 다 노지 농사를 짓다 보니, 비가 오는 날은 쉬는 날이라 다들 김치전에 막걸리는 기본이다.
무산댁 자신도 비만 오면 아침부터 소주를 까면서, 내가 넘사시럽다고? 이제까지 술을 좋아한다는 이유로 이장을 못 한 남자는 아무도 없었다. 오히려 술을 많이 마실수록 호탕하다느니, 호연지기가 있다느니, 이딴 식의 반응을 보였으면서···.
(술을 좋아하는) 여자라서 이장은 안 된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이 문장 하나로 모든 게 설명될 수 있었다. 내가 술을 싫어했어도 다들 내가 이장이 되는 걸 반대했을 것이다. 이 괄호 안에는 무슨 말이든 끌어올 수 있다. 결론은 내가 여자라서 이장은 안 된다, 이거다. 갑자기 마음이 변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이장을 꼭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반격
"내도 이장을 한 4년 정도 했지만, 지금 박 이장은 쫌 심하다꼬. 내가 이장 할 쩍에 마을 회관 개보수를 했꼬, 경지 정리도 했뿟다 아이가. 그란데 박 이장 이노마는 6년 동안 아무꺼또 마을에 해논 게 없다꼬. 박 이장아, 우리 마을이 뭐 문화재라도 지정됐나? 동네 꼬라지를 한 개도 몬 바꾸고 요대로 보존해야 되는 기라 뭐라? 이제꺼정 노인회 총무 하는 거 보믄, 나는 일영이가 이장하는 것도 괜찮지 싶다꼬."
잠자코 있던 김 영감이 느닷없이 한마디를 던졌다. 동네에 협동조합과 마을기업 이야기가 돌면서 김 영감은 마을 일에서 손을 뗀 듯한 느낌이었는데, 의외였다.
"내도 일영이가 이장 하믄 잘할 것 같다꼬. 삽질 잘하지, 예초기도 잘 돌리지, 욕 잘하지, 힘도 씨지, 꼼꼼해가꼬 뭐를 시키놔도 일을 잘하더라꼬."
소평댁은 말을 마친 뒤 나를 향해 이빨이 빠져 순박해 보이는 미소를 던졌다. 그것 때문이었을까, 나도 모르게 박 이장과 마을 주민들을 향해 한 가지 제안을 하고 말았다.
"오늘부터 선거 운동 시작하고, 일주일 뒤에 투표로 이장을 뽑는 게 어떨까요?"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탈자 신고
댓글3
함양에서 태어나
도시에서 살다가
함양으로 귀농함
공유하기
암탉 꽥꽥 집안 폭삭? 나도 더는 참을 수 없다
기사를 스크랩했습니다.
스크랩 페이지로 이동 하시겠습니까?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