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혼비 <다정소감>
안온
김혼비 작가도 그런 사람 중 한 명이다. 전작 <우아하고 호쾌한 여자 축구>를 통해 유쾌하고 따스한 시선을 보여줬던 그가, 이번엔 새로운 산문집을 펴냈다. 제목은 <다정소감>. '다정이 남긴 작고 소중한 감정들'이라는 부제가 달린 이 산문집은, 지금의 김혼비를 만든 따스한 시간들, 호의와 연대의 흔적이 촘촘히 기록돼 있는 비밀 일기장 같은 책이다.
'다정'을 주제로 한 산문집이라니. 미담이야 좋지만, 그저 그런 뻔한 내용들로 가득 차 있는 건 아닐까. 예상과 달리, 김혼비 작가가 풀어놓은 이야기들은 생각보다 그리 '뻔하지' 않다. 작가 스스로가 에필로그에 밝힌 말처럼, "뻔하다면 뻔한 패턴의 이 이야기들은 결코 뻔하지 않았다. 하나하나 저마다의 방식으로 고유했다. 뻔한 다정이란 없었다."(p. 219)
'그의 SNS를 보았다'라는 제목의 에피소드가 대표적이다. 어느 날, 김혼비 작가가 좋아하던 뮤지션이 SNS를 시작한다. 문제는, 올리는 게시물마다 맞춤법이 엉망진창이라는 것. 팬심을 '시험'하는 듯한 그 글들을 보다 못한 김 작가는 자신의 SNS에 이 같은 고충을 털어놓은 글을 올린다.
김 작가가 올린 글에 공감의 답변이 이어지던 와중에, 누군가 이런 글을 올린다. "가정 형편도 어려운 와중에 알바하는 틈틈이 어떻게든 자기가 하고 싶은 음악을 하느라 다른 걸 돌아볼 시간도 없었을 텐데 그깟 맞춤법 좀 엉망이면 어떻다고." 수신인을 정확히 언급하지 않았지만 자신을 '저격'한 것이 분명한 그 글을 보며, 김혼비 작가가 반박을 하는 대신 택한 건 '성찰'이었다.
쉽게 찾을 수 있는 정보들로 그의 인생 타임라인을 대충 그려봐도 그는 평생 음악할 시간도 부족한 사람이었다. 생계를 위해 돈 버는 시간을 뺀 나머지 시간들은 그에게 결코 충분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 사실이 그의 맞춤법에 얼마나 지배적인 영향을 줬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나는 이 두 가지를 연결해볼 상상력이 아예 없었다. 그날 나는 그동안 내가 기본 소양이라고 여겨왔던 것들, 사회가 기본 소양이라고 설정해놓은 것을 무비판적으로 가져다 써왔던 일들에 관해 생각했다. 그런 태도가 때로 무심코 지워버리는 것에 관해서도 생각했다. (p.102)
누군가는 이 에피소드가 왜 '다정'이라는 주제로 묶이느냐고 되물을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이런 이야기들이야말로 가장 '김혼비다운' 다정의 흔적이 아닐까 생각했다. 인식의 한계를 정확하게 인정하고, 내가 미처 상상해보지 못한 타인의 삶을 사려깊게 돌아보는 것. 나의 무심함으로 인해 누군가 상처받을 수도 있다는 점을 늘 기억하고, 그를 위해 부단히 내 태도를 가다듬는 것. 이런 삶의 자세 또한 '다정'이라는 범주에 넣는다면, 정말 우리의 다정함이 세상을 구할지도 모른다.
그런가 하면, 이 책에는 김혼비 작가가 그간 '받아온' 다정의 기억도 담겨 있다. 김 작가가 과거 신입 승무원으로 첫 비행을 앞두고 있을 때, 화장과 머리 손질에 능하지 않은 그를 걱정해 새벽부터 일어나 그를 도왔던 동료들과의 추억, 회사 상사와의 트러블로 깊은 슬럼프에 빠졌을 때 20시간 넘게 사골을 끓여 세상 어디에도 없는 '진짜 미친 사리곰탕면'을 만들어준 친구와의 일화까지.
이제 와 하는 말인데 솔직히 그날의 맛이 잘 기억나지는 않는다. 대신 기억나는 건 가게 앞에 쭈그러져 있는 풍선 인형에 바람을 넣으면 팽팽하게 부풀면서 우뚝 서듯 무너져 있던 마음 한구석이 서서히 일어나던 생생한 느낌. 한 입 두 입 계속 먹을 때마다 몸속을 세차게 흐르는 뜨겁고 진한 국물에 심장에 박혀 있던 비난의 가시들이 뽑혀나가는 것 같았다. 마음의 틈새마다 눌어붙어 있던 자괴와 절망이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p.210)
글을 읽다 보면 속절없이 마음이 스르르 풀리는 따뜻한 기억들이 잔뜩 담겨 있다. 22개의 이야기를 다 읽고 책장을 덮었을 때, '다정한 사람이 되어야겠다'는 조금 유치한 다짐을 하게 되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박준 시인은 이 책의 추천사를 쓰며 이렇게 말했다. "분명한 것은 작가의 다정은 작가의 다감이 만들었다는 것이다. 다정을 느껴본 사람은 다정을 느끼게 할 수도 있으니까." 김혼비 작가의 다감이, 그리고 그 다정이 더 많은 이들에게 스며들길 바란다. 누군가에게 이 책이 '진짜 미친 사리곰탕면'처럼, '한 시절을 건널 수 있게 해 주는' 힘이 되길 바란다. 그리고 그 힘을 또다시 누군가에게 건넬 수 있길 바란다. 모든 다정한 사람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다정소감 - 다정이 남긴 작고 소중한 감정들
김혼비 (지은이),
(주)안온북스,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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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NS에서 저격당한 작가가 반박 대신 택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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