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신뢰이동'
흐름출판
노벨 경제학상을 받은 조지프 스티글리츠는 "세상이 돌아가게 만드는 것은 돈보다 신뢰다"라고 말했다. 맞는 말이다. 신뢰가 결합되지 않은 돈은 그저 종잇조각에 불과하다.
현대인의 일상은 신뢰 없이는 도저히 유지될 수 없다. 사이트에 개인 정보를 입력해도 그것이 유출되지 않으리라는 믿음, 결제를 하면 빠른 시일 내에 상품이 도착하리라는 믿음, 정해진 시간만큼 성실히 일하면 한 달 뒤 대가를 받으리라는 믿음 등 일상에서 중추적 역할을 하고 있는 신뢰를 제거하면 이 사회는 금방 붕괴되고 말 것이다.
레이첼 보츠먼의 저서 〈신뢰 이동〉은 신뢰가 어떻게 사람들을 움직이는지 다룬 책이다. 여기에는 물론, 신뢰를 통해 우리가 누릴 수 있는 놀라운 혜택과 누군가가 신뢰를 악용하였을 때 감당해야 하는 치명적 손해가 모두 해당된다.
저자는 독일의 저명한 사회학자 니클라스 루만의 정의를 인용하며 신뢰를 설명한다. "신뢰는 기대치에 대한 확신이다." 그리고 이 정의에 딱 걸맞는 NRMA의 사례를 덧붙인다. NRMA는 오스트레일리아에서 가장 신뢰받는 브랜드로, 고장 신고를 받으면 어디든 달려가서 차를 수리해주는 회사이다.
어느 날 한 여자가 고속도로를 달리다가 몇 년 전 아들이 차로 치여 죽은 곳을 지나쳤고 그 때문에 공황발작이 왔다. 그녀가 갓길에 차를 세워서 전화를 한 곳은 남편도, 동료도 아니고 NRMA였다. 몇 분 만에 긴급출동대원이 도착했다. 그리고 두 시간 넘게 여자 곁을 지켰다. 라디오를 듣거나 이야기를 나누며 그녀가 다시 운전대를 잡을 수 있을 때까지 기다렸다. 여자가 대원에게 한 말은 이러했다. "NRMA라면 와줄 줄 알았어요."
이 사례가 흥미로운 이유는 가족이나 친구를 향한 개인적인 신뢰보다 직접적으로 알지 못하는 관계인 집단을 향한 일반적 신뢰가 더 강하게 발휘되었기 때문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 걸까.
디지털 사회는 너무도 복잡하게 얽혀 있어서 필연적으로 불특정 다수와 관계를 맺을 수밖에 없다. 아는 사람하고만 마주치고 살아갈 수 없다는 뜻이다. 생전 처음 보는 사람과 상거래를 해야 하고, 신원이 불분명한 사람에게 내 개인 정보를 넘겨야 할 경우도 생긴다.
그럼에도 대다수의 사람들이 이 시대에 잘 적응하며 살아갈 수 있는 이유는 사랑, 우정 등 개인적인 감정을 뛰어넘을 만큼 확고하게 신뢰할 수 있는 시스템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솔직히 말하자. 가끔은 친구나 애인이 알려준 정보보다 더 믿음직한 시스템의 정보에 따라 선택을 내릴 때가 있지 않은가?
이 책에는 신뢰 도약이라는 개념이 등장한다. 설명하자면 이렇다. 아는 것과 모르는 것 사이에는 위험이 존재한다. 그 밑에는 불확실성이라는 강이 흐르고 있다. 하지만 여기에 신뢰라는 돌다리가 놓아지면 사람은 그것을 받침 삼아 모르는 것으로 손쉽게 건너간다.
수많은 기업들이 브랜드 가치를 높이기 위해 엄청난 투자를 이어가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대다수 소비자들은 상품에 대한 신뢰를 브랜드에서 찾는다. 그리고 브랜드가 고객의 신뢰를 얻는 가장 좋은 방법은 자신들이 구축한 시스템이 얼마나 튼튼한가를 보여주는 것이다.
저자는 중국의 사업가 마윈의 예를 가져온다. 마윈이 창립한 회사 알리바바는 2014년 9월 뉴욕증권거래소에서 사상 최고치를 기록하며 상장되었다. 그는 자신을 보려고 뉴욕증권거래소 앞에 모인 사람들에게 "오늘 여기서 치솟은 것은 돈이 아니라 사람들의 신뢰입니다"라고 외쳤다. 기업공개가 있던 날 한 인터뷰에서는 1분 동안 '신뢰'라는 말을 무려 여덟 번이나 반복했다.
중국은 전통적으로 관시(관계)에 기반을 둔 사회이다. 개인적인 인맥으로 얽힌 사람이 아니면 불신하는 경향이 있다. 대부분 사람들이 이러한 환경에서는 온라인 거래를 기반으로 하는 사업이 성공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마윈은 낯선 판매자를 친숙한 타인으로 바꾸어 이 문제를 해결했다.
알리바바는 2001년 트러스트패스라는 서비스를 시작했다. 판매자는 제3자의 신분증명서와 은행 계정을 확인하는 절차를 거쳐 트러스트패스 인증을 받아야 했다. 이는 판매자들에게 공식 업체라는 이미지를 부여함으로써 소비자들의 불안을 경감시켰다.
이어서 알리바바는 판매자들이 각자 브랜드를 만들어 갈 수 있도록 지원했다. 미지의 낯선 판매자를 동네 시장에서 만나는 친숙한 상인으로 바꿔놓는 돌다리를 놓는 과정이었다. 또한 2004년에는 결제와 관련된 불확실성을 줄이기 위해 온라인 결제 시스템 알리페이를 출시했다.
한편, 신뢰는 가끔 악랄한 배신이라는 결말을 맞닥뜨린다. 더욱이 배신자가 국가일 경우에 결말은 더욱 처참하다. 예를 들어 1932년부터 1972년까지 미국공중위생국은 터스커기 카운티의 아프리카계 미국인 600명을 마루타로 삼아 실험을 자행했다. 그것도 당사자들은 전혀 모르게.
실험에 이용된 사람들은 대부분 문맹이던 흑인 농부들로, 고통스러운 요추 천자(척추 아래 부분에 바늘을 꽂아 골수를 뽑는 시술-옮긴이)를 받고 매일 피를 뽑히다 사망하면 해부까지 당했다. 실험에 참여한 대가로 이들에게는 고작 무료 점심과 병원에 오가는 교통편, 무료 약 처방과 무료 장례식이 제공되었을 뿐이다.
의사들은 이 가난한 농부들에게 단지 '나쁜 피'를 치료한다고만 알렸다. 농부들 중 399명은 매독 환자였고 나머지 201명은 매독에 걸리지 않은 통제집단이었다. 연구의 목적은 매독의 장기적 증상을 관찰하고 사망자를 해부해서 매독을 치료하지 않을 경우 흑인에게 미치는 영향이 백인에게 미치는 영향과 동일한지 알아보는 것이었다.
이 사건이 폭로된 이후 주목할 만한 통계가 집계되었다. 이 책에 따르면 현재 미국 흑인 남자 집단의 건강 상태는 모든 주요 인종과 민족과 인구통계학적 집단 가운데 최하 수준이다. 의사를 믿지 못하는 흑인들이 병원에 가기를 꺼려하기 때문이다. 정기검진을 하지 않으니 병을 발견하는 시기도 늦어졌다.
그 결과 45세 흑인 남자의 기대수명은 동일한 연령의 백인 남자보다 3년이나 짧아졌다. 물론 이 결과에는 소득, 식생활 등 다른 요인도 작용할 것이다. 하지만 연구 결과 격차의 원인 중 3분의 1이 터스커기 실험 폭로의 여파에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프랜시스 후쿠야마는 저서 〈신뢰〉에서 이렇게 설명했다. "공동의 가치관에서 신뢰가 생긴다. 신뢰는 거대하고 측정 가능한 경제적 가치를 지닌다." 그런데 신뢰가 유지되려면 무엇보다 상호 호혜성이 보장되어야 한다. 누군가 일방적으로 이익을 독차지한다면 신뢰는 무너질 수밖에 없다.
신뢰의 기본은 우리가 모두 한 배를 탔다는 전제이다. 정치인이나 기업가의 비리가 드러났을 때 국민들이 공분하는 이유는, 그들이 배의 균형을 무너뜨렸기 때문이다. 그 균형은 다름 아닌 공정성과 평등이다. 구성원 모두 이 사회를 유지하기 위해 동일한 제약을 받고 있다는 믿음 없이 어떻게 현실의 규칙을 따를 수 있을까. 그렇기에 제도적 신뢰를 추락시킨 장본인은 꼭 엄벌에 처해야 한다.
신뢰는 영원히 복잡한 문제로 남을 것이다. 누구를, 무엇을 믿을 것인가라는 질문에 올바른 답을 찾는 과정은 결코 간단하지 않다. 사람의 두뇌는 생각보다 직관적으로 신뢰와 불신을 판단한다. 때로는 진실을 외면하고 원하는 정보만 선택적으로 받아들인다. 이때 필요한 것이 신뢰 휴지이다. 무심코 SNS 게시물에 좋아요를 누르고 공유하기를 누르기 전에 잠시 차분히 생각하는 여유를 잊지 말자.
신뢰 이동 - 관계·제도·플랫폼을 넘어, 누구를 믿을 것인가
레이첼 보츠먼 (지은이), 문희경 (옮긴이),
흐름출판,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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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일해지고 싶으면서도 다른 사람과 달라지는 것에 겁을 먹는 이중 심리 때문에 매일 시름 겨운 거사(居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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