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왜 세계의 가난은 사라지지 않는가' 표지
시공사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가 베스트셀러가 되었을 때, 독자들이 이 책을 선택한 이유가 궁금했다. 자본주의의 어두운 면을 보고자 하는 호기심 때문에? 아니면 불공평한 세상을 향한 억눌린 분노 때문에? 그것도 아니면 기아로 죽어가는 아이들을 향한 연민이었을까?
어쨌든 독자들이 불평등의 심각성을 평소 막연하게라도 느끼고 있음은 분명했다. 뭔가 잘못 돌아가고 있다는 인식은 그만큼 만연했다. '부의 편중에 저항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하는 그런 마음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1%의 부자가 되면 그만이다, 하는 이기심이 아니라 잘못된 구조를 바꿀 수는 없을까, 하고 고민하는 열정 말이다.
<왜 세계의 가난은 사라지지 않는가>는 위 책의 작가 장 지글러가 2019년 새롭게 내놓은 책이다. 이만큼 발전된 사회라면, 모두가 사치를 부리며 살 순 없어도 가난을 모면할 순 있지 않을까?(수치상으로 실제로 가능하다) 그런데 왜 가난은 불식되지 않는 걸까?
이 책의 첫 장에는 '손주들 모두에게 이 책을 바친다'는 문구가 적혀 있다. 책도 할아버지와 손주 조라의 대화로 구성되어 있다. 그래서 이 책을 읽다 보면 불평등이 심화된 세상에서 살아가야 하는 새로운 세대를 향한 염려와 그럼에도 그들이 자본주의의 악순환을 끊어낼 거라는 믿음이 곳곳에서 묻어난다.
작가는 유엔 식량특별조사관이었을 때 수행했던 임무를 들려주며 자본주의의 실체를 들춰낸다. 작가가 과테말라에 방문했을 때의 일이다. 그곳에는 태평양 연안을 따라 매우 비옥한 검은 대지가 펼쳐져 있는데, 그 땅에는 바나나, 토마토, 멜론, 파인애플, 아보카도, 키위 농장들이 끝도 없이 이어졌다.
그 농장들의 주인은 유나이티드 프루트, 델몬트 푸드, 유니레버 제너럴 푸드 등 거대 다국적 기업들이었다. 그들에게 고용된 마야족 노동자들은 쥐꼬리만 한 삯을 받으며 겨우 연명해가고 있었다.
과테말라에서는 토지 소유주 중 1.86퍼센트에 해당하는 외국인 혹은 내국인이 경작 가능한 땅의 67퍼센트를 차지하고 있다. 작가를 비롯한 식량특별조사관들은 원주민 공동체를 보호하고 농업 일용직 노동자들의 권리를 되찾는 내용을 골자로 하는 보고서를 유엔 인권 위원회와 유엔 총회에 차례로 제출했다.
작가는 곧 강력한 반격에 맞닥뜨렸다. 그 중 유엔 주재 미국대사는 '사유재산권을 무시하고 시장의 자유로운 활동을 마비시키는 공산주의적인 사항들'이라며 작가를 비난했다. 미국 정부는 과테말라 보고서에 적대적인 표를 긁어모았고, 거대 다국적 기업들은 보고서를 물 먹이는 데 쉽게 성공했다.
금융 자본의 제왕들은 이와 똑같은 방식으로 아프리카를 착취하고 있다. 콩고 동쪽, 너른 초원과 호수 지대인 키부에서는 민간 기업들이 콜탄을 채취한다. 콜탄은 '비행기 동체와 휴대전화를 비롯해 선진국 국민들의 삶에 없어서는 안 되는 물건들'을 만드는 재료이다.
문제는 이 광물이 채석하기 어려운 곳에 매장되어 있다는 것이다. 갱도가 너무 좁아서 몸이 마른 어린아이들만 들어갈 수 있는 곳도 있다. 영화 <설국열차>를 보면 몸집이 작은 어린 아이가 기계 부품을 대신하여 기차를 움직이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것이 전혀 과장이 아니었던 것이다.
광산의 소유주들은 쉴 새 없이 키부 북부 마을들을 누비고 다닌다. 광산에서 일할 어린아이를 뽑기 위해서이다. 참고로 키부의 광맥이 묻힌 곳은 암석들이 부서지기 쉬워서 낙석이 빈번하다. 산 채로 매장되어 질식사하는 사고가 일어나지만 이를 예방할 수 있는 별다른 방법이 없다.
그곳에서 쥐꼬리만 한 임금을 받으며 하루 종일 용병들의 총구 앞에서 위협을 받으면서 키부의 콜탄 광산에서 일하는 어린이, 청소년 들의 두려움에 가득 찬 눈길, 굶주림 때문에 바싹 마른 가냘픈 몸집을 난 평생 잊지 못할 게다.
놀라운 점은 우리 주변에서 이러한 사실을 알려주는 이가 별로 없다는 것이다. 과일을 파는 기업이든 휴대전화를 파는 기업이든, 상품이 얼마나 맛있고 멋있는지만 광고할 뿐 어떻게 그 상품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알려주지 않는다. 정부도, 언론도 마찬가지이다. 작가는 '금융 자본에 의해 유지되는 세계의 질서란 현지 정부의 적극적인 공모와 부패 없이는 제대로 기능할 수 없다'고 말한다.
예전에 '광고는 공기다'는 문장을 본 적이 있다. 그 당시에는 과장된 문장이라고 생각했다. '에이, 아무리 그래도 그 정도는 아니지.' 하지만 지금은 그 문장을 때때로 떠올리며 얼마나 적합한 말인지 매일 같이 깨닫는다.
내 의지와 무관하게 나는 숨 쉬듯 광고를 보며 살아간다. 포털사이트를 창을 열어도, 티브이를 켜도, 유튜브를 봐도, 대형마트에 가도, 시내버스나 지하철을 기다를 때도 온갖 광고들이 내 시각과 청각을 점령한다.
광고의 목적은 소비를 유발하는 것. 하지만 모두 공감하듯 최근 미니멀리즘이 대두된 이유가 무엇인가. 너나 할 것 없이 필요 이상으로 물건을 사들이기 때문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각종 기업들은 꾸준히 신제품을 출시하며 소유욕을 자극한다.
한쪽에서 가지고 싶어 할수록 다른 한쪽에선 가난해질 수밖에 없다. 그리고 양쪽을 연결하고 있는 다국적기업은 이 순환을 통해 막대한 부를 축적한다.
작가는 방글라데시의 봉제 공장을 방문했을 때 충격적인 장면을 목격한다. '유리창은 깨지고, 가구엔 덕지덕지 때가 끼었고, 가파른 계단은 삐걱거리는 건물들' 속에서 '젊은 여성들이 교대해 가며 하루 24시간 내내 재봉틀을 돌리'고 있었다.
방글라데시엔 이런 식의 봉제 공장이 6,000개 가량 있는데 이 공장들은 인도나 방글라데시, 타이완, 한국 사업가들의 소유물이야. 이들 공장 소유주들 가운데 상당수는 정말이지 지독한 고리대금업자 같은 존재들이란다.
작가는 자본주의자들이 이 지구상에 군림하는 한 아무도 소비사회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말한다. 반대로 생각하면, 그렇기에 누구도 예외 없이, 금융 자본을 장악한 '세계 정부'에 맞설 의무가 있다.
독일의 철학자 칸트는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나 아닌 다른 사람에게서 가해지는 비인간성은 내 안의 인간성을 파멸시킨다." 세계화로 한 데 묶인 세상 속에서 '남 일'이란 어디에도 없다.
왜 세계의 가난은 사라지지 않는가 - 유엔인권자문위원이 손녀에게 들려주는 자본주의 이야기
장 지글러 (지은이), 양영란 (옮긴이),
시공사,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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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일해지고 싶으면서도 다른 사람과 달라지는 것에 겁을 먹는 이중 심리 때문에 매일 시름 겨운 거사(居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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