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에게 받은 꽃라넌큘러스의 아름다운 자태
정지현
아내가 쓴 편지 속 이야기는 계속됐다. 우리가 처음 만난 날 내가 준 꽃을 아직도 기억했다. 멋없는 고백에 아내는 못 이기는 척 내게 기회를 줬고, 25년이 넘은 그 시간이 희미하지만 어렴풋이 떠올라 이른 아침 내 감정을 더 몽글몽글하게 만들었다.
'맞아. 내가 흰 장미를 좋아했지.'
오랜만에 내가 좋아했던 꽃을 떠올리니 옆에 화병에 꽂힌 하얀 장미가 더 탐스럽고, 아름답게 보였다. 아내의 오래전 추억이 내게도 같은 추억으로 떠오르는 게 감사하다. 오래전 난 아내에겐 무얼 해줘도 늘 기뻤다. 아내가 해주는 걸 받으면서도 기쁨을 느꼈지만 아내에게 해줄 때, 아니해줄 수 있을 때가 무엇보다 기뻤다.
계산적이지 않았고, 소위 얘기하는 '기브 앤 테이크'의 관계를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결혼하고, 나이가 들면서 언젠가부터 아내에게 무언가 해줄 때 기쁜 마음은 같았지만 아내에게 서운한 감정이 들 때면 종종 내가 아내에게 배려해준 것들이 쪼잔하게도 생각나곤 했다. 아내에게 받은 손편지와 하얀 장미 한 송이가 그 시절의 내 마음을 다시 돌아보게 했다. 아내는 여전히 내게 가장 소중한 사람임은 그때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사실 어제가 밸런타인데이였다. 연애할 때부터 내겐 밸런타인데이도, 화이트데이도 주는 선물의 종류만 달라지지 내가 아내에게 초콜릿과 사탕을 주는 이벤트 데이라고 늘 생각했다. 덕분에 식구가 늘면 늘어나는 숫자만큼 초콜릿 개수도, 사탕 개수도 늘어날 뿐이었다.
작년까지도 아내와 아이들에게 밸런타인데이 때 초콜릿을 선물했다. 하지만 올해 밸런타인데이에는 매년 주던 초콜릿을 주지 못했다. 그것도 갑자기 저녁 약속까지 잡혀서 함께했어야 할 저녁시간도 가족과 함께 하지 못했다. 아마도 아내는 이 이벤트를 준비하며 내가 기뻐할 모습을 기대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 감동한 표정을 아내에게 보여주지 못했다. 곤히 자는 아내를 깨우지도 못하고 미안한 마음만 가득이다. 아쉬운 마음에 두 번이나 읽은 편지와 아내에게 받은 하얀 장미를 카메라와 내 마음에 담았다. 아내의 깜짝 이벤트 덕에 몽글몽글해진 마음을 안고 출근길에 나섰다. 이른 아침 날씨인데도 봄 날씨같이 훈훈하게 느껴졌다.
어느 SNS에서 본 내용이 떠올랐다. 이유 없이 만나면 친구고, 이유가 있어야 만나면 지인이고, 이유를 만들어 만나면 애인이란다. 내게 아내는 이유를 불문하고 늘 함께하고 싶은 소중한 사람이다. 나중에 아내가 알려준 사실이지만 내가 받은 흰 장미라고 생각한 꽃은 '라넌큘러스'란다.
그러고 보니 가시도 없고, 장미보다 더 풍성하고 우아해 보인다. 나이가 들어서 그런가 고고하고, 화려한 흰 장미보다 풍성하고, 우아함 그리고 여유가 돋보이는 이 녀석이 더 매력적으로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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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 26년 만에 꽃을 받았는데 왜 이렇게 미안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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