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년여에 걸친 서울 남산 예장자락 상부 재생사업 공사가 끝나고 녹지공원이 생겼다. 사진은 3일 서울 중구 남산 예장자락 사업 현장의 '기억6'. 과거 이 장소에 있었던 옛 중앙정보부의 지하 고문실을 재현했다.
연합뉴스
그는 지하실에서 시달림과 혹독한 수사를 받았다.
주로 김대중과 관련시키려는 수사였다. 근년에 그를 만난 사실이 전혀 없어서 저들이 작성한 시나리오에 이르지 못하면 고약한 여러 방법으로 보복했다. 직접 물리적 고문을 당하진 않았으나 옆방에서 학생들의 비명은 고문보다 더 아팠다.
한달쯤 지난 어느 날인데 이택돈 변호사님을 마구 구타하고 난리가 났어요. '김대중 내각 구성' 운운하는 명단이 나왔대요. 그런데 이택돈 변호사가 속였다는 거야. 수사관들이 교대로 막 때려요. 이때부터는 맨 구타소리야. 옆방에 학생들 붙들려오면 무조건 때리는 거야. 그러다가 몇 시간 지나면 내보내고 다른 학생들 잡아와서 또 무작정 구타하고. 그때 조성우도 붙들려 와서 초주검이 됐다고 해요. 저와 김승훈 신부, 조화순 목사, 이렇게 몇 명만 물리적 구타를 당하지 않았어요. 너무 무서웠어요. 사람들 비명소리 때문에 잠을 잘 수가 없었고요. (주석 4)
무엇보다 견디기 어려웠던 일은 수사관들의 입에서 거침없이 "뭐, 인권운동, 민주화운동, 다시는 너희들 입에서 그런 말이 안 나오도록 해주겠다, 완전 뿌리 뽑겠다."고 내뱉는 폭언이었다.
인권이나 민주화는 인류보편의 가치인데, 저들은 그 운동가들을 적대시하였다. 같은 시대 같은 하늘 아래 살면서 이토록 대척점에 서게 만든 독재자들의 죄가 얼마나 무거운가를 되새겨야 했다.
"그때 정말 힘들었어요. 제 생애에서 가장 힘들더라고요. 절망의 터널 속에 갇혀 있으면서 모욕을 고스란히 참아내야 한다는 것. 그에 대해 나중에 여러 번 강론했습니다." (주석 5)
밤낮을 가리지 않고 따져도 엮을 거리가 없어서인지, 본래 의도대로 김대중을 제거하려는 목표가 달성된 것인지, 두 달 만에 풀려났다.
암담한 상황에서 신앙인으로나 사제로서 성서적 삶에 대한 묵상, 순교자들과 예언자들에 대한 묵상, 예수님 십자가 죽음에 대한 묵상, 그런 주제들을 반복했을 뿐입니다. 로마제국 시대 300여 년을 지속했던 무자비한 박해 속에서 지하교회의 아픔을 생각하고, 그러면서 제 믿음을 더욱 심화하는 계기로 삼은 거지요. 1980년에 더 깊이 깨달았습니다만, 신앙은 암흑과 절망 가운데서도 희망을 간직하는 의지적 선택입니다. 그 점을 늘 묵상하면서 지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박정희의 죽음을 통해서 구약성서에 나오는 출애굽 사건의 기적을 체험할 수가 있었고요. 이게 기적이구나! 제 생애에서는 아주 아름다운 신앙의 원체험에 가깝다고 말씀드릴 수가 있어요. (주석 6)
주석
4> <함세웅 신부의 시대증언>, 360쪽.
5> 앞의 책, 262~263쪽.
6> 앞의 책, 26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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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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