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 일본군 준위 출신이었던 함병선은 제주4?3사건 당시 단일사건으로는 가장 많은 인명 희생을 가져온 북촌 학살사건의 가해 부대였던 제2연대의 연대장이었다. 이후 중장까지 진급 후 예편하여 국립묘지인 대전현충원 장군묘역에 안장되어 있다.
임재근
북촌 학살사건의 가해 부대는 구체적으로 제2연대 3대대다. 3대대는 비밀리에 입대한 서북청년회 회원들이 대부분을 차지해 이른바 '서청대대'라 불리었다. 대전현충원에는 서북청년회를 주도했던 인물도 안장되어 있다. 바로 서북청년회 초대위원장을 지낸 선우기성(독립유공자 1-85)과 서북청년회 중앙본부 위원장을 지낸 문봉제(경찰1-501-8)다.
4.3 사건 당시 300여 명의 제주도민들은 대전형무소로 끌려왔고 한국전쟁 발발 이후 모두 학살됐다. 이들은 70여 년 동안 대전의 동남쪽에 위치한 산내 골령골의 땅속 긴 구덩이 속에서 누구의 뼈인지도 모른 채 뒤엉켜 있었다. 그런데 4.3사건의 가해 책임자들은 정반대 편, 대전의 서북쪽에 위치한 국립묘지 대전현충원에 안장되어 있는 것이다.
제주에 주둔하기 직전 제2연대는 여수에서 봉기한 14연대를 진압하기 위해 순천과 여수에 투입되었다. 제2연대(1, 2대대, 3대대 일부) 부대원들은 순천 진압 작전부터 1949년 초까지 순천시내 민간인을 연행한 뒤 북국민학교와 순천농림중학교에서 고문으로 취조했고, 건물 뒤편에서 집단 사살했다.
제2연대는 여수에서 협력자 색출에도 주력했다. 여수 사람들을 서국민학교 운동장에 모아 놓고, 우익청년단원과 경찰의 협조를 얻어 협력자를 심사한다면서 길게 늘어선 인간 터널을 통과하게 하여 누구라도 손가락질에 걸리게 되면 협력자로 분류하였다. 일명 '손가락총'이다. 협력자로 분류된 사람은 학교 뒤 밭의 구덩이로 끌려가 총살로 즉결 처형되었다.
일부 '부역혐의자'로 분류된 사람은 종산국민학교로 압송되어 군법회의에 회부되었다. 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선고받은 사람은 오동도, 만성리 등에서 학살되었으며, 무기징역, 20년 징역, 5년 징역 등을 선고받은 사람은 전주, 대전, 대구, 김천 형무소에 수형되었다. 이들은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대부분이 학살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