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현충일마다 대전현충원 김창룡 묘에서는 파묘 퍼포먼스를 비롯해 이장 촉구 행사가 벌어진다. 사진은 2019년 현충일에 김창룡 묘에서 벌어진 시민단체들의 시위
임재근
김창룡의 대전현충원 안장이 논란 되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일제 강점기 그의 친일 행적이고, 두 번째는 군대 복무 시절 백색 테러, 용공조작사건, 민간인 학살 등에 대한 책임이다.
김창룡은 1941년 4월 신징(장춘)에 있는 일본 관동군 헌병교습소에 입소해 교육을 마친 후 헌병보조원으로 근무했다. 그는 주로 조선과 중국의 항일조직을 정탐하는 임무를 담당했다. 같은 해 10월 중지군(中支軍)의 아마카스(甘粕) 사단 파견헌병대에 배속되었으며, 소만(蘇滿) 국경 부근에 파견되어 중국공산당과 소련에 대한 첩보 활동에 나섰다.
김창룡은 1943년에 싱안베이성(興安北省)을 중심으로 지하공작을 펴던 중국공산당의 거물 왕진리(王近禮)를 검거하는 데 결정적인 공을 세웠고, 관동군 헌병대는 왕진리를 역공작으로 이용해 소만 국경지대에서 활동하던 9개 지하조직을 색출하고 조직원 50여 명을 체포했다.
김창룡은 이 공로로 헌병 오장(伍長)으로 특진했다. 그가 2년 동안 공장지대를 중심으로 암약하면서 항일조직을 적발한 것은 50여 건이 넘었다. 이러한 이유로 김창룡은 민족문제연구소가 발간한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되었다.
일제가 패망하자 김창룡은 고향인 함경남도 영흥으로 돌아왔다. 1945년 11월과 1946년 4월 소련 군정에 의해 거듭 전범(戰犯)으로 체포되어 사형선고까지 받았으나, 가까스로 탈출해 월남했다.
월남 직후 김창룡은 국방경비대 사령부 부관으로 있던 박기병 소위를 만났고, 그의 추천으로 국방경비대 제5연대에 사병으로 입대했다. 김창룡은 관동군 헌병 출신이라는 이유로 연대장의 경비사관학교 지원 추천을 받지 못하자, 부대를 이탈해 박기병이 근무하던 제3연대로 찾아갔고 정보하사관으로 재입대했다. 그러던 중 만주군 대위 출신 제3연대장 김백일의 추천으로 1947년 1월 조선경비사관학교(육군사관학교의 전신) 3기로 입교해 95일간의 단기교육을 마쳤다.
1947년 4월, 소위로 임관한 김창룡은 국방경비대 제1연대 정보장교로 보직돼 장병들의 사상사찰을 담당하며 숙군작업에 나섰다. 과거 관동군 헌병 시절 지하조직을 색출하던 능력을 여순사건 직후 전군 차원으로 강도 높게 진행된 숙군작업에서 발휘하며 숙군의 선봉장이 되었다.
1948년 11월~12월 사이 남로당 군사부 연락책임자 김영식와 군사부 총책 이재복을 검거하고, 오일균 소령과 김종석, 최남근 중령을 검거했다. 당시 정보국 선임과장 박정희 소령도 김창룡의 검거망에 걸려들었지만, 죽음의 문턱에서 기적처럼 구제되었다. 백선엽 정보국장, 장도영 김정권, 미군 고문관 하우스만 대위 등의 구명운동 덕이었다. 1949년 11월까지 1년간의 숙군작업으로 장교, 하사관, 사병 등 4749명이 기소되었다.
"김창룡은 김구 암살 지시 배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