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영애 교수가 퇴임 후 경기도 여주에 지은 연구공간 여백서원의 입구.
주미영
전집 24권 중 4권은 그의 괴테 연구서가 포함된다. 나머지 20권에 들어갈 괴테 작품을 선별하고 분류하여 번역하는 일은 '간난신고'의 대 작업일 수밖에 없다. 괴테의 시, 드라마, 소설, 서간집 등을 망라한다. 중국의 경우 괴테 전집 발간작업에 120명의 학자를 투입하고 있다는데, 혼자의 힘으로 어떻게 이 대역사를 마무리 할 것인가.
그러나 그는 '국책 사업'으로 추진되는 중국의 경우를 바람직하지 않은 것으로 본다. "120명이 투입되어 남김없이 번역하겠다는 것은 거대한 기념물이야 되겠지만, 극단적으로 말하면 한 단어가 120가지로 번역될 수도 있다는 의미"라는 생각이다. 그는 단호히 주장했다. "혼자 하는 일은 힘들지만, 그래도 혼자 해야만 하는 일"이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지난한 일이라는 건 변함이 없다. 지난 50년 간 괴테를 읽었던 공력이 있다고 하더라도, 마치 태산을 옮기는 일과 같이 거의 무한대의 집념 없이는 이루기 어려운 일이다. 그래도 절반 정도는 번역을 마쳤다고 하니 '5년 내 완성'이 불가능한 목표는 아닐 수 있다.
가장 난해한 작업으로 꼽히는 <파우스트>는 지난 2019년 두 권으로 번역돼 이미 출간됐다. '도서출판 길'이라는 작은 출판사가 이 전집의 출간을 자청했다. 직원이 사장을 포함하여 세 사람에 불과한 출판사다.
사장이 서울대 독문학과 동기동창이란 걸 나중에 알았지만, 소개 받기 전에는 동창생이 그 출판사의 사장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전영애에게는 '도서출판 길'이 미스터리다. "꼭 망할 것 같은 좋은 책만 골라 출간하는 것 같은데, '이상하게' 망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후술하겠지만 전영애의 독문학 독법은 특이했다. 어떤 작품이건 읽으면서 번역을 해둔다는 점이다. 출간 여부와 상관없이 번역을 한다. 시간이 많이 걸리지만 그 누구보다도 치밀하고 꼼꼼하게 작품을 접하게 된다는 장점이 있다.
▲전영애 교수는 여백서원 근처 작은 동산에 '작은 괴테마을'을 건립 중이다. 사진은 괴테마을에 들어설 '젊은 괴테의 집'이다. 올 연말 경 완공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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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적같은 계기, 예상치 못했던 '백기사'의 도움
그 사이 70여 권의 책이 묶였음에도 출간하지 않은 번역 원고가 아직도 제법 있다고 하니, 전영애의 자신감은 서랍에 넣어둔 그 미 출간 원고에서 나오는지 모른다.
여백서원 근처 동산에 건립을 추진하고 있는 괴테 마을도 전집 못지않은 대 역사다. 필생의 꿈이라고도 할 수 있다. 바이마르 괴테 하우스, 프랑크푸르트 괴테 생가, 괴테가 설계한 벨베데레 정원까지 그의 흔적을 평생 관찰하고 궁구했던 전영애다.
그는 "나이 일흔이 넘으니 괴테의 전모가 한눈에 보이는 것 같고 알맹이만 가려낼 안목이 생긴 것 같다"고 말한다. 전집 작업 못지않은 의욕과 자신감을 내비친다. 그러나 그가 피력한 자신감의 근거는 소박함과 욕심 버리기다. 크게 지을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전집 작업과 마찬가지로 에센스만 모으면 된다는 전략이다. 여주를 동양의 괴테마을로 조성하는 일은 충분히 가능한 프로젝트로 본다. 괴테의 고향 바이마르가 인구 6만 명의 소도시임에도 세계적인 문화 도시가 된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괴테마을의 공공성을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면 순조로운 건립은 장담할 수 없다. 여백서원 건립에만도 거의 기적과 같은 계기, 전혀 예상치 못했던 백기사의 도움이 작용했다. 괴테마을 본관 건축은 공사비 급등으로 예정된 계획이 보류된 상태다.
▲여백서원은 매년 5월 말에 오마토를, 10월 말에 시마토 행사를 갖는다. 각각 마지막 주 토요일에 열리는 이 행사에는 제자들과 일반인이 모여 독서와 토론회, 작은 공연을 갖는다. 지난 5월 28일 오마토 행사 때는 대안학교 학생들이 방문해 저글링 공연을 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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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3200평 규모의 여백서원을 돌아본다. 시의 정자라는 의미로 시정(詩亭)을 먼저 세웠고, 서원 본관인 이곳 여백재(齋)를 지었다. 해외 학자 게스트하우스 우정(友亭), 작은 갤러리와 '스무 명을 위한 파우스트 극장'이 있는 예정(藝亭)이 있다. 또 차고를 개수하여 어린이도서관을 만들었다.
일반인에 공개하는 날은 매월 마지막 토요일이다. 5월과 10월에는 특히 많은 사람들이 모여 글을 읽고 강연과 토론을 한다. '오마토'(5월의 마지막 토요일), '시마토'(10월의 마지막 토요일)라고 부르는 날은 여백서원의 명절이다. 많은 사람들이 와서 '알아서' 먹고, 자고 간다. 서울대에서 강의를 들었던 제자들도 찾아오지만 대부분은 서로 친소, 이해관계가 전혀 없는 사람들이다. 누구든 환영을 받는다.
"출발부터 '진짜' 작가를 만난 것이 축복"
전영애는 자수성가한 학자다. 사실상 혼자 힘으로 학문을 일궜다. 외롭게 공부했고, 지독한 끈기와 집념으로 도전했다. 그가 스승으로 꼽은 인물들도 40~50대에 만난 사람들이다. 그들을 만나기 전 그의 학문적 기반은 이미 확고했다. 무수한 독일 작가들에 대해 통찰 가득한 논문을 썼다. 그러나 그는 스승을 통해서도 도약했다. 그 과정이 드라마틱했다.
괴테만을 읽은 게 아니다. 최고의 독일어 작가들을 두루 섭렵했다. "출발부터 '진짜' 작가를 만난 것이 축복"이라고 그는 말했다. 프란츠 카프카와 파울 첼란, 라이너 쿤체를 깊이 연구했다. 그리고 크리스타 볼프, 폴커 브라운, 두어스 그륀바인 등 분단시대 작가들을 거쳐 최근에는 그림 형제와 니체로까지 나아갔다.
지난 5월 라이너 쿤체상을 받을 때 미하일 크노헤 박사가 축사를 했다. 25년간이나 바이마르 '안나 아말리아 대공비 도서관'의 관장을 맡았던 인물이다. 1995년 전영애가 괴테학회 장학생으로 바이마르에 왔을 때를 그는 이렇게 회상했다.
"그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도서관에서 공부했다. 도서관 문을 닫는 '마지막 1초'까지 공부했다. 대체로 그는 기숙사가 있는 벨베데레 성으로 가는 마지막 버스를 놓쳤다. 마지막 몇 분이라도 더 도서관에 있으려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칠흑같이 어두운 길을 걸어야 했다."
▲전영애 교수의 증조부가 남긴 책 <노재문집>. 목판본으로 전해오던 것을 1962년 후손들이
책으로 묶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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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영애의 부계와 모계는 학맥과 학풍이 깊었다. 증조부는 유서 깊은 안동 도산서원과 영주 소수서원의 원장을 지냈다. 모계 쪽도 못지않았으나 6.25 전후 극심한 비극을 겪어 몰락했다고 한다. 증조부 상은 8일장으로 치렀다. 장례를 치르면서 60가마 분량의 쌀로 밥을 지었다고 한다.
조부는 일찍 돌아가셔서 기억이 없다. 전 교수의 부친 전우순은 그래서 당신의 조부(전영애의 증조부) 슬하에서 성장했다. 부친은 91세로 별세하기 몇 년 전부터 조부가 남긴 문집을 한글로 번역하는 일에 전념했다.
"그 작업은 지난했습니다. 선친은 옥편 여러 권을 옆에 두고 문집을 번역했어요. 문집은 시·서·명·기(詩·書·銘·記) 4부분으로 이뤄졌습니다. 참으로 놀라운 것은 글을 남기지 않으려는 선비의 습벽 때문에 증조부가 당신의 시(詩)를 거의 남기지 않고 버렸다는 것이었어요. 타인에게 보낸 서간문(書)도 수집이 쉽지 않았겠지요. 묘비명(銘)과 공무기록(記)은 남아 있었겠지만요. 조부가 버린 시가 적힌 종이를 손자들이 모아둔 게 있었나 봅니다. 글을 남기지 않으려는 것은 선비로서 마지막 허영심까지 버리려는 태도인데, 그 정신이 자못 고고합니다. 일본에 나라를 빼앗기고 경성에 오셨을 때 '남대문 앞에 풀이 무성하다'는 내용의 짧은 시를 한 수만 지으셨더군요. 담담한 표현에서 망국의 슬픔이 오히려 더 강하게 읽혔습니다."
신문지조각도 밟지 않았던 어머니
증조부는 1954년 무렵 돌아갔는데 1962년 후손들이 판각을 해서 문집을 냈다. 그 목판본은 아직도 증조부가 살던 영주의 옛집에 남아 있다. 그 집은 규모는 작지만 좋은 목재를 썼다. 튼튼하게 지어 그 원형이 잘 보존돼 있다는 것이다. 전영애는 영주의 이 고택을 여주 '여백서원'에 옮겨 복원하고 싶다.
▲부친이 한글로 번역한 전영애 교수의 증조부의 문집. 별세하기 몇년 전부터 각고의 노력을 기울여 완성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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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친은 당신 조부의 문집을 번역하면서 목판본의 한문을 한자 한자 모두 새로 쓰셨습니다. 한 글자만 틀려도 그 페이지 전체를 다시 써야 하는 고된 작업이었겠죠. 저기 보이는 것처럼 38자루의 붓의 끝이 모두 망가졌습니다. 우연히 서원에 들른 전문가 한 분이 그러시는데 붓 하나로 적어도 2만자 이상을 써야 그렇게 마모가 된다고 합니다. 최소한 80만자 이상을 썼던 것으로 추정된다는 것이죠."
▲전영애 교수의 부친이 생전에 사용한 붓. 마모된 정도로 보아 80만 자 이상의 글자를 썼던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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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친은 인텔리로 성장했다. 일제시대 휘문고보를 졸업하고 일본 와세다 대학에서 수학했다. 해방 이후에는 서울대 문리과대학에서 정치학을 전공했다. 5·16 이후 잠깐 정치에도 뜻을 둔 적도 있기는 했으나, 대개는 고향 영주의 한 농업고등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부친은 장손이었다. 증조부에게 한학을 배우다가 12세에 학교에 들어갔다. 2학년 때 결혼을 하여 두루마기를 입고 학교에 다녔다. 16세에 시집에 온 모친은 큰 집안 살림을 꾸리느라 신고(辛苦)의 나날을 보내야 했다. 결혼 18년 만에 전영애를 낳고, 8년 차이가 나는 동생이 생겼다. 어머니는 성정이 자상하고 배움에 대한 열망이 큰 사람이었다. 어린 딸 전영애가 서울에 유학할 때 붓으로 쓴 편지를 많이 보냈다고 한다. 그 편지들을 제대로 보관 못했던 것이 못내 아쉽다.
"일을 하시다가 수업을 마치고 멀리서 아장아장 걸어오던 제가 보여도, 따뜻하게 한 번 기다려 맞아주지 못했던 것을 못내 슬퍼하셨죠. 2학년 말에 제 키가 128cm였는데, 학교까지 왕복 12km을 걸어서 다녔거든요. 어머니는 목화씨를 뿌려 그 무명실로 옷을 지으셨고, 탈곡기에서 껍데기 있는 벼를 받아 밥 짓기를 시작하셨어요."
▲글읽기를 좋아했던 전영애 교수의 모친은 생전에 한글 육전소설 등 수많은 책을 붓으로 필사했다. 여백서원 본관 천정에 가로로 길게 걸어 전시했다. 전 교수는 모친의 이 필사본을 바라보며 학자로서의 마음가짐을 여민다.
주미영
구김이 잘 생기고 수축되기 쉬운 게 무명옷이다. 그 옷을 일일이 손질하고 간수하는 데에 또한 얼마나 많은 수고를 바쳐야 했을까. 모친은 학교 문턱에도 가본 적이 없었지만 홀로 독서에 매진했다. 글을 너무도 사랑했다. 신문지 조각이나, 광고전단지조차 함부로 밟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 종이 위에는 글이 인쇄돼 있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말할 수 없는 고난의 생애를 사셨습니다. 그 와중에도 책만 보면 일일이 한지에 필사를 했습니다. 그것이 낱장이 되어 흩어지도록 읽었고, 읽은 책은 다 외우셨어요. 어릴 때 육전(六錢)소설을 어머니랑 같이 읽었던 기억이 지금도 납니다."
중학생 때부터 시작된 '읽어야 할 운명'
그러면서 모친이 붓으로 필사한 글들을 보여준다. 책으로 묶인 것은 <강릉추월전> 한 권밖에 안 남아 있지만, 규방가사 두루말이들은 오동나무 함에 가득 들어 있다. 여백서원을 찾는 이에게 모친의 필사본을 자주 보여준다. 귀한 것과 간절한 것이 무엇인지를 알려주고 싶기 때문이다.
"영주에서 초등학교 5학년을 마치고 서울로 가게 됐죠. 선친이 저도 모르게 서울에 하숙집을 마련하셨어요. 미리 준비를 하고 계셨던 거죠. 영주에서 서울까지 기차를 여섯 시간 반을 타고 가는데, 코가 새까매졌던 기억이 납니다."
초등학교를 졸업한 전영애는 1963년 경기여중 시험에 합격했다. 시골 어린이가 홀로 서울에 유학을 온 것만도 대견한 일이다. 단 1년을 공부하고 경기여중에 입학했으니 놀라운 일이다. "영주에서 신동 소리를 들었느냐"는 질문에는 "그럴 리 없다"며 웃는다.
예나 지금이나 서울 명문학교 입학에는 치맛바람이 거셌다. 입학 시험장에는 학부모들이 구름처럼 몰려왔다. 6학년 때 담임교사는 은근히 전영애의 '수석입학'을 기대했다고 한다. 필기시험에서 거의 만점을 받았기 때문이다.
담임선생은 남대문 시장에 가서 체력고사용 바지를 사주기도 했다. 가벼운 저지 바지였는데 회색 바탕에 초록색 다이아몬드 문양을 지금도 생생히 기억한다. 그런 '귀한 옷'을 입고도 체력장 결과가 시원치 않아 수석은 하지 못했다.
▲전영애교수의 망중한전영애 교수의 망중한. 전 교수는 3200평 규모의 여백서원을 혼자 관리하면서 괴테전집 번역과 '작은 괴테마을' 건립에 진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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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친은 전영애의 인생에 한 번도 개입하지 않았다. 경기여고를 거쳐 서울대 독문과에 진학했던 때가 1969년이다. 대학 진학할 때 "약학을 전공하면 어떻겠느냐"는 '의견'을 제시한 적이 있지만, 문학에 뜻을 뒀던 전영애는 부친의 권고를 따르지 않았다. "그 이후 아버지는 한 번도 제 인생에 개입하지 않았다"는 것이 전영애의 회상이다. 어릴 때 부친의 모습은 전영애의 기억에 거의 남아 있지 않다. 그 정도로 부친은 바깥일에 분주했다. 학생들을 가르치고, 남은 시간은 큰 집안의 대소사를 챙겨야 했다.
부친이 했던 말 중 기억에 남는 것은 '신외무물'(身外無物)이다. "몸 외에는 아무 것도 없다", 즉 몸이 가장 귀하고 소중하다는 말이다. 무슨 일을 하든 도무지 몸을 아낄 줄 모르는 딸이 염려되었던 것이다. 가끔 하나를 덧붙여서 "세상에 투기(妬忌)처럼 무서운 것은 없는데…."라며 말끝을 흐렸다고 한다. 그렇게 열심히 세상을 살아가며 겪게 될 어려움을 내다보신 아버지로서의 염려였을 것이다.
전영애의 독서욕은 대단했다. 문학작품을 좋아했다. 인문학이라는 것은 결국 읽는 것인데, '읽어야 하는 운명'은 중고등학교 시절부터 시작됐다.
"경기여중고는 귀한 집 딸이 많았습니다. 촌에서 올라온 저는 '미운 오리새끼'였지요. 수업이 끝나면 도서실에 앉아 있거나, 학교 앞 작은 서점에 들렀다가 초라한 하숙방으로 돌아가곤 했습니다. 고향집에서는 매달 하숙비 외에 용돈도 조금 보내왔는데, 저는 돈을 쓸 줄 몰랐어요. 언젠가 붕어빵을 한 봉지 사본 기억밖에 없을 정도로…. 그때 마침 큰 출판사 두 곳에서 세계문학전집을 내고 있었습니다. 을유문화사 세계문학전집을 샀던 기억이 납니다. 한 권에 200원 남짓했던 그 책들이 문학공부의 첫 걸음이 됐죠. 풀빛 하드커버의 촉감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제인 에어> <개선문>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같이 쉬운 책도 있었지만, <백경> <신곡> <팡세> <파우스트>와 같은 어려운 책도 고생하며 읽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 시절 릴케와 헤세를 읽은 것이 나중에 독문학을 택하게 된 계기가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2부(놀라운 후원자 알프리드 홀레, 학문 스승 헨드릭 비루스를 만나다)로 이어집니다.
전영애는.... |
△1951년 경북 영주 출생 △1973년 서울대 독문과 졸업 △1985년 서울대 독문과 박사 취득 △1985년 경원대 독문과 부교수 △1996년 서울대 독문과 교수 △2006년 한국괴테학회장 △2008년 독일 프라이부르크 고등연구원 수석연구원 △2008년 독일 뮌헨대 강사 △2011년 독일 바이마르 괴테학회 수여 괴테 금메달 △2011년 서울대 교육상 △2011년 한국문학번역원 이사 △2014년 여백서원 건립 △2015년 오스트리아 인스부르크대 초빙교원 △2016년 서울대 정년 퇴임 △2020년 삼성행복대상 △2020년 이미륵상 △2021년 라이너 쿤체상 △'괴테 시 전집' '괴테 자서전 시와 진실' '파우스트 I·II' '괴테 서·동 시집' '데미안' '변신·시골의사' 등 70여 권 번역 및 소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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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학교 영어영문학과를 졸업하고 중앙일보(공채 24기)에 입사했다. 이후 월간중앙에서 오랜 기간 기자로 일했다. 사회팀장, 정치팀장을 거쳐 선임기자로 다양한 분야 인물 인터뷰 기사와 탐사보도에 참여했다. 한국 사회를 관통하는 여러 현상을 세계사적 흐름과 견줘보며, 여러 인물 간의 조화와 긴장관계를 심층취재를 통해 들여다보고 싶은 꿈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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