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5년7월20일, 지학순 주교(가운데 꽃다발 쓴 이)와 김지하 시인(지 주교 오른쪽)이 환영인파와 함께 원동성당을 향해 가두행진 중이다.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박정희 정권은 김지하를 국사범으로 취급해서인지 한때 독방에 가둬놓고 옆방을 몇 개씩 비워놓고 일체의 접근과 통방을 막았다. 그는 어떻게 해서든지 자신의 정체성을 지키고 공산주의자로 만드는 진술서와 정보부의 공작을 깨뜨려야 했다.
이 시기에 지학순 주교의 <양심선언>을 시작으로 민주인사들의 '양심선언운동'이 전개되고 있었다. 김지하도 이 방식을 추구했다. 하지만 옆방과 통방조차 불가능한 절해고도와 같은 감방이었다. 생각나는데로 하나씩 메모하고 구상을 할 때 기적과 같은 일이 생겼다. 양심적인 교도관 전병용이 나타난 것이다.
그래서 조영래가 양심선언 초를 잡고, 김정남이 그걸 구치소로 전병용 교도관을 통해서 들여보냅니다. 김지하가 자기 의견을 붙여서 가필을 해서 다시 내보내고, 김정남이 받아서 조영래한테 갔다 왔다 이걸 몇 차례 했어요.
그게 한꺼번에 만들어진 게 아닙니다. 그러면서 자꾸 보완도 되고 그랬겠죠. 그러니까 양심선언을 보면 별 고급이론이 많이 나와요. 뮈 신학자 이야기도 나오고, 그거 김지하가 안에서 서적도 없이 감시당하는 상황에서 다 쓸 수 있는 게 아니에요. 다 밖에서 정리해서 알려 준 겁니다. 신부들한테 배워오고. 떼야르 샤르뎅이니 신부 이야기도 많이 나오고요. (주석 8)
이런 과정을 거쳐 마련된 <양심선언>은 김지하가 있던 구치소 내 사동에 청소의 일을 맡은 소년수를 통해 민주회복국민회의 상임대표를 맡고 있는 명동성당의 윤형중 신부에게 전해지고, 윤 신부는 필리핀의 가톨릭을 통해서 일본의 소아(相馬) 주교에게 전달되어 해외에서 먼저 공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