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1년 2월 7일자 한겨레 1면 기사. (출처: 네이버뉴스라이브러리)
한겨레
민주정의당·통일민주당·신민주공화당의 3당 합당 선언(1990.1.22)으로 출범한 민자당은 이듬해인 1991년 2월 6일 밤중에 국회 내무위원회에서 경찰법 정부안을 날치기 통과시켰다. 다음날 발행된 <한겨레> 1면 중간 기사는 "밤 10시 40분께 질의, 축조 심의, 소위 심사, 찬반 토론, 표결 등의 절차를 일방적으로 생략한 채 정부 원안을 그대로 상정"했다고 설명했다. 이렇게 하는 데엔 30초도 걸리지 않았다. "20여 초 만에 처리했다"고 기사는 알려준다.
날치기는 5월 10일 본회의 때도 재현됐다. 11일자 <한겨레> 톱기사 '보안법·경찰법 날치기 처리'는 "민자당은 이날 오후 속개된 국회 본회의에서 국가보안법·경찰중립화법안의 수정안을 야당 의원들의 격렬한 항의 속에 제안 설명과 심사 보고, 표결 절차를 생략한 채 일괄 상정"했다고 보도했다. 이때는 2월 6일보다 시간이 더 소요됐다. "35초 만에 날치기 처리했다"고 기사는 전한다. 두 차례의 날치기에 도합 1분도 걸리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게 통과된 법안이 5월 31일 공포되고 7월 31일부터 시행돼 8월 1일 경찰청 발족을 낳았다. 경찰청과 더불어 경찰위원회(경찰행정 심의·의결 기구)를 지금의 행정안전부인 내무부 아래에 두는 법안이 이렇게 통과됐다. 이것이 오늘날의 경찰청이 탄생한 과정이다.
경찰청법 강행 처리했던 민자당, 이유는
정리해보자. 경찰청 독립을 원치 않았을 뿐 아니라 두려워하기까지 했던 민자당 정권이다. 그랬던 민자당이 경찰법을 통과시키고자 3개월 시차를 두고 날치기를 반복했다. 220석의 압도적 우위로 경찰청 발족을 무산시키지 않고, 두 차례 강행 처리로 법안 통과를 성사시켰다.
이런 모순된 상황이 연출된 배경은 2년 전인 1989년 11월 30일에 있었던 일에서 확인할 수 있다. 3당 합당 2개월 전에 있었던 이 일은, 민자당이 원치 않는 법안을 날치기까지 해서 강행시켜야 했던 이유를 설명해준다.
6월항쟁 이듬해 치러진 1988년 4·26 총선에서 '125석 대 174석'이라는 여소야대 정국이 출현했다. 이런 속에서 평화민주당·통일민주당·신민주공화당은 의석의 우위를 앞세워 경찰 중립화 개혁을 추진했다. 이 상황은 야 3당이 1989년 11월 3일 경찰법 단일안을 마련하고 11월 30일 국회에 제출하는 단계로 이어졌다.
합의된 야권 단일안을 소개하는 4일자 <한겨레> 1면 우중단 기사는 "평민·민주·공화 등 세 야당은 3일 경찰의 정치적 중립성을 확보키 위해 국무총리 산하에 5인의 합의제 국가경찰위원회를 두고 그 아래 경찰청을 설치토록 하는 것을 골자로 하는 경찰법 단일안을 확정"했다고 보도했다.
1991년 경찰법도 그렇고 지금의 경찰법(국가경찰과 자치경찰의 조직 및 운영에 관한 법률)도 그렇고, 경찰청과 국가경찰위원회를 내무부(행안부) 산하에 둔다. 치안본부를 내무부 산하에 두던 독재정권 시절 관행을 버리지 못한 결과다.
그에 반해 1989년 야권 단일안은 경찰청과 국가경찰위원회를 국무총리 산하에 뒀다. 내무부가 소관 사무인 선거·국민투표 등에 경찰력을 동원할 가능성을 그렇게 차단하고자 했던 것이다. 행정부 차원에서 경찰청을 통제하되 내무부를 통한 정치적 악용의 소지를 줄이기 위한 포석이었다.
야권 단일안은 국가경찰위원회 구성에서도 정권의 입김을 최대한 배제했다. "국회 교섭단체가 추천하는 4명의 위원과 국무총리가 제청하는 위원장(국무위원) 1명을 대통령이 각각 임명"하는 방식이었다고 위 기사는 말한다. 1991년 경찰법과 현행 경찰법은 국가경찰위원을 내무부장관(행안부장관)이 제청하고 국무총리를 거쳐 대통령이 임명하도록 규정한다. 내무부 산하에 두는 법을 떠올려볼 때, 이런 야권 단일안은 그 당시 매우 새롭게 다가왔을 것이다.
별다른 변수가 없었다면 1989년 야권 단일안이 국회를 통과했을 것이다. 박정희·전두환 정권에 참여했던 세력이 두려워할 만한 일들이 벌어질 뻔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 세력은 가만히 있지 않았고, 3당 합당 뒤에 결국 이 야권 단일안을 무산시켰다. 민정당 출신의 민정계가 중심이 된 이들은 경찰이 공룡처럼 될 가능성에 대한 우려를 확산시키고 국회가 경찰위원을 추천하는 것의 위험성을 과장했다.
1991년 4월 14일자 <조선일보> 3면 등에서 확인되는 것처럼, 민자당 정권은 '지금은 분단 상황이다', '국회가 경찰위원을 추천하면 정당의 입김이 개입된다' 등의 이유를 들며 선전전을 펼쳤다. 과거에 경찰을 악용해 민주주의를 억누를 때도 분단 상황을 운운했던 세력이 경찰 조직을 독립시키는 마당에도 똑같이 분단 상황을 거론했던 것이다. 거기다가, 이들은 국회 추천권을 인정하면 "사사건건 대립하는 정당들의 간여를 허용"하게 된다며 국회의 간여를 위험시하기까지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