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협 직원들은 주기적으로 금융 범죄 피해 예방 교육을 실시한다.
월간 옥이네
"좀 과장된 표현일 수 있지만, 농협이 사라지는 날이 곧 그 농촌이 사라지는 날이란 이야기도 있습니다. 농촌과 농협은 운명공동체예요. 농협은 시중은행과 달리 금융 업무뿐만 아니라 경제 업무도 같이 진행합니다. 경제사업본부에서 추진하는 영농 지원과 영농 자재 보급 사업, 곡물 수매 등은 농가 소득을 지키는 데다, 농촌의 경제 구조가 붕괴하지 않도록 자생성을 유지하는 긍정적 역할도 합니다."
이원농협 이중호 조합장의 평가대로 농협은 농촌 주민들에게 금융 서비스를 제공하는 거의 유일한 전진기지나 마찬가지다. 만약 충북 옥천에서 농협이 사라지면 대전까지 금융 업무를 보러 가야하는 상황에 놓인다.
비대면으로는 할 수 없는 경제 사업 신청이나 주택 청약 등의 업무를 보기 위해서라도 지점 유지는 반드시 필요하다. 또 농협이 진행하는 농민 대상 금융 교육과 금융 범죄 피해 예방 교육도 받을 수 없게 돼 피해자가 급증할 것은 불 보듯 뻔한 일.
"몇 년 전엔가, 옥천농협에서 진행한 금융 교육을 들은 적이 있어요. 그때 금리 변동에 맞춰서 대출을 더 잘 받는 방법도 듣고, 계좌 관리하는 것도 배우고 그랬죠. 코로나 기간에는 온라인으로 열었다는데, 내가 그런 걸 할 줄 알아야 말이죠. 농협이 없어지면 여까지 찾아와 가르쳐줄 은행이 있겠어요? 지점도 없애는 마당인데."
군북면에 거주하는 안영순씨는 NH농협은행이 진행하는 '행복채움 금융교실' 이수자다. 이 프로그램은 NH농협은행이 주관하고 각 지역 지부가 실행하는데, 옥천의 경우 농협은행 옥천군지부가 맡아 시행해왔다. 금융 지식이 부족했던 안씨는 교육 참여로 효율적인 예·적금 관리 방법을 배웠고, 적립률이 좋은 적금 상품도 하나 들 수 있었다. 시중은행도 비슷한 사업을 추진하고는 있지만, 농협만큼 전국단위에서 대대적인 농촌 금융 교육을 펼치는 곳은 없다.
농촌에서 농협은 그저 '은행'이 아니라, 금융의 마지막 보루다. 애초에 농업협동조합, 그러니까 농민이 주인인 조합이기에 당연한 의무지만, 국가 행정기관인 우체국마저 수익성을 이유로 농촌 지점을 없애는 게 현실이다. 당장 옥천도 사라질뻔한 안남우체국을 겨우 지켜낸 과거가 있지 않은가.
금융 범죄를 걸러내는 '대면 안전망'
"어르신, 그거 보이스피싱 같은데요? 일단 더 자세히 확인해보셔야 해요. 요즘에는 정말 범죄 방식이 교묘해졌어요. 여기 안내장 보시고 저희 절차대로 확인 기다려주세요."
농촌 은행에 가면 가끔 듣게 되는 대화 내용이다. 보이스피싱·스미싱(문자를 이용해 금융 정보를 해킹하는 것) 범죄가 기승을 부린 몇 년 전보다는 기세가 죽었지만, 아직도 고령자를 대상으로 이런 사기 행각을 벌이는 경우가 많다.
옥천만 해도 올해 보이스피싱 범죄를 예방한 공로로 표창받은 농협 직원이 군북지점을 비롯해 여럿 나왔다. 예방 횟수가 많다는 건, 그만큼 보이스피싱 시도 사례도 잦다는 뜻이다. 도시라고 크게 다르진 않지만, 농촌 고령자가 범죄 피해자가 되는 경우가 더 많다.
"한 달에 보통 한두 번 정도 그런 사례를 겪어요. 그래도 농협 직원들이 사기 시도를 많이 걸러내요. 지난달에도 따님이 휴대전화를 잃어버렸다며 돈을 보내달라고 요구해 저희 농협에 찾아온 분이 있었어요. 정말 무서운 게, 요즘은 정도를 넘어 범죄 방식이 더 치밀하고 정교해졌어요. 전에는 유출된 개인 정보를 보고 어설프게 사칭을 시도했다면, 지금은 신분증까지 위조하고 연락처와 메일 주소까지 해킹해 감쪽같이 다른 사람 흉내를 내요."
이원농협 김영숙 대리의 말처럼, 농협은 농촌 금융 범죄 예방의 '3차 병원'이나 마찬가지다. 중환자의 마지막 보루가 3차 병원이듯, 농촌도 농협이 '최후의 안전망' 역할을 한다. 스미싱으로 휴대전화를 해킹해 통장 비밀번호를 빼가거나, 신분증을 위조하고, 구분이 불가능한 금융 기관 사칭 홈페이지를 제작해 계좌 정보를 훔치는 등 날로 진화하는 범죄 수법 때문에 골머리가 아프다고.
"대응 방법을 고민하다가 직접 보이스피싱을 '공부'하고자 일부러 당해본 적이 있어요. 물론 송금 전 단계까지만 진행했는데, 금융 종사자인 저조차 모르고 당했다면 속았을 거예요. 특히 농촌 주민이 취약한 디지털 사기 수법은 치명적이고요. 그래서 농협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보호가 필요한 '현금 사용할 권리'
'현금'의 설 자리가 줄어드는 것도 격차를 한층 부채질한다. 여기서 현금이란 지폐·동전 등 실물 화폐를 말한다. 지난 7월 1일부터 시범 운영에 들어간 대전광역시의 '현금 없는 시내버스'가 대표적이다.
대전광역시가 밝힌 바에 따르면, 대전 시내버스 승객 중 현금 지불 비율은 1.5%(2022년 기준)다. 1.5%의 승객을 위해 현금 요금통을 설치·관리하는 비용이 1억 원 이상이어서 낭비가 심하다는 게 이유다.
대전 제도가 옥천과 무슨 상관인가 싶겠지만, 옥천과 대전을 잇는 유일한 간선버스 '607번 버스'도 현금 사용이 불가능해져 남의 일이 아니게 됐다.
이른 아침, 대전에 가려고 군북면 이백리 정류장에 서 있던 이금순(83)씨는 버스를 타려다 '얼토당토않은' 이상한 소리를 들었다.
"할머니, 앞으로는 버스요금 현금 안 받아요. 9월까지는 시범 운영하고 10월부터는 정식 운영하니까 앞으로는 교통카드 준비하세요."
손에 구겨 쥔 천 원권 지폐와 500원 동전이 잠시 목적지를 잃고 방황한다.
"무슨 버스가 현금을 안 받는대유?"
하지만 '제도'는 항의를 허락하지 않는다.
"607번 버스는 그렇게 하기로 했어요."
사정을 설명하는 기사도 난감한 표정이다. 드문드문 앉은 승객들은 안내 때문에 출차가 늦어지자 미간을 찡그린다.
"참말로, 돈 안 받겠다는 말은 머리털 나고 처음 듣네. 이제 교통카드만 된다 이거잖아. 아 나도 카드 있어. 여기선 현금만한 게 없으니 그러지. 카드 쓸 줄 몰라 이러간? 버스회사는 촌에서 카드 충전하기가 쉬운 줄 아는가봐. 아 읍 사람들이야 충전할 데 많으니까 몰르지. 나처럼 면 사람들은 버스 타려면 맨날 농협 가서 충전해야 되는 거여? 무릎팍도 애린데 농협까지 가려면 큰일났네."
옥천농협 군북지점 앞에서 만난 송아무개씨도 화가 잔뜩 났다. 뻔히 돈을 들고도 탈 수 없게 하겠다는 세상 심보에 '부아'가 치밀어서다. "관리 편하게 하겠단 거 아녀. 시골에서 현금 쓰지 말라는 게 말이 되는 일인가?"
땀을 뻘뻘 흘리며 삼양사거리 정류장에 서 있던 이아무개 이병도 당황스럽긴 마찬가지다. '100일휴가(신병위로휴가)'를 나와 고향 옥천을 찾은 그는 버스 탈 때 자기도 모르게 현금에 먼저 손이 간단다.
"시행한다는 이야기는 들었는데 부대에 있어서 이달부터인지 몰랐습니다. 젊은 저도 그러는데 어르신들은 어떨지 눈에 선합니다." 현금 사용 금지 자체보다도 시행 정보가 전해지지 않는 게 더 큰 문제란 것.
'금융 갈라파고스'가 되지 않을 방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