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지돈대 전경
문화재청
1871년에 강화도에서 미국과 조선이 벌인 전쟁은 오징어 게임과는 달리 현실 상황이었다. 강화도는 포연이 자옥한 전장이 되었다. 서해에서 조선의 심장인 한양으로 들어오는 길목인 강화도는 그야말로 '목구멍'이었다. 강화도가 점령당하면 조선은 심각한 처지에 놓일 수 있다. 그래서 병사들은 목숨을 걸고 적을 막았다.
신미년에 미국과 벌인 전쟁이라고 해서 '신미양요'라고 부르는 그 전투는 강화해협의 아래쪽인 초지진과 덕진진 그리고 광성보에서 벌어졌다. 강화의 동쪽 바다인 '강화해협'은 '염하'라고도 불리워지는데 길이가 불과 20여km밖에 되지 않는다. 건너편인 김포와의 거리도 1km도 채 되지 않으니 바다라고 하기 보다는 강에 가깝다.
이 짧고 좁은 바다를 지키기 위해 수많은 진지들이 구축되었으니, 초지진도 그중의 하나다. 초지진은 강화의 12진보(鎭堡) 중 하나로 1656년(효종 7) 경기도 안산(安山)에 설치되었다가 1666년(현종 7) 강화도로 옮겼다.
강화도에는 5개의 진과 7개의 보가 있었다. 현대의 대대와 중대급 규모의 이 군사조직에는 그 규모에 따라 종3품의 첨절제사와 종4품의 만호, 종9품의 별장이 장수로 배치되었다. 초지진에는 방군 11명, 군관 19명, 토병 88명 등 총 118명이 배속 되어 있었다. 또 보유하고 있는 배도 3척에 달했다. 이로 살펴봤을 때 초지진의 규모는 상당했을 거로 추정된다.
신미양요와 초지진
초지진에는 초지돈대, 장자평돈대, 섬암돈대가 속해 있었다. 세 돈대 모두 강화해협으로 들어가는 초입에 있었다. 그러나 돈대 앞의 갯벌을 메꿔 평야가 되자 섬암돈대와 장자평돈대는 존재 이유가 사라졌다. 성벽 돌은 제방 둑을 쌓는데 이용되었고 돈대는 버려져 있다시피 했다. 이후 두 돈대는 터만 남기고 사라졌다.
두 돈대와 달리 초지돈대는 존속했다. 초지돈대는 역사의 격랑을 온 몸으로 헤쳐 나갔다. 1871년 신미양요와 1875년 운요호 사건 때 초지돈대는 쏟아지는 포탄을 맞으며 이 땅을 지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