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기 식물6개월이 지난 현재의 모습, 4개의 잎이 나왔다.
장순심
나를 발견하는 재미
식물을 돌보는 것은 기다림의 미학 같다. 몇 개의 유기 식물을 통해 확인했듯 긴 기다림의 시간을 보내며 내가 이렇게 느긋한 사람이었다는 사실도 새삼 확인한다. 매일을 계획대로 살려고 하고 어긋나면 자책하는 사람이었는데, 식물을 앞에 두고는 한 템포 쉬어가는 여유가 생긴다. 삶을 덜어내는 느낌에다 단순하게 생각하는 것이 가능하다. 이렇게 복잡한 일상이 균형을 잡는다.
공간적인 면에서도 비슷하다. 식물을 돌보기 시작하며 안 그래도 비좁게 느껴지던 공간이 확연히 좁아졌다. 특히 겨울의 추위를 피해 식물을 모두 거실로 들여놓을 때면 거실의 절반 가까이를 식물에게 자리를 내어 주어야 했다. 그렇게도 한 철을 보냈고 이번 겨울은 아마도 지난 겨울보다 훨씬 더 넓은 자리를 내어주게 될 것이다.
화분의 크기보다 두세 배 넓게 퍼진 잎들이 더 넓은 자리를 당당히 요구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당황스런 마음도 잠시, 넓게 층층히 펼쳐진 잎들의 자태는 언뜻 보아도 우아해서 절로 넓은 자리를 기꺼이 양보하게 된다. 건강하게 잘 크는 아이를 보는 것 같은 뿌듯함에 식물의 키가 커진 느낌, 줄기가 굵어진 느낌이 들면 기특하고 대견한 마음까지 생긴다. 내어 준 자리가 전혀 아쉽지 않다.
인공의 공간에 자연의 날것이 들어온다는 것은 파격이다. 작은 움직임에도 흙먼지가 날리고 가끔은 거미도, 작은 곤충도 식물과 함께 있는 것을 확인한다. 외출했다 집에 발을 들이는 순간 코끝에 스치는 자연의 냄새, 흙냄새도 이제는 익숙하다. 결벽증처럼 잡아내던 잡티와 흙먼지가 더는 괴롭지 않다. 심지어 벌레도 이제는 견딜 만하다.
벼가 농부의 발소리를 듣고 자란다는 말처럼 집안의 식물들도 그렇다. 식물은 관심과 애정을 쏟는 만큼 반응하는 것 같다. 식집사의 호흡과 눈길을, 움직임과 손길을 잘 알아챈다는 생각이 든다.
식물을 키우며 날마다 나를 발견하는 재미도 있다. 오랜만에 지인을 만나면 식물 이야기가 이어진다. 한두 개 정도 식물을 키우지 않는 사람이 없으니 대체로 말이 없는 사람끼리지만 대화가 계속 이어진다. 식물을 키우는 사람, 그 타이틀이 주는 상징을 입는다. 차분하고 생기 가득한 사람의 옷도 자연스럽게 걸친다.
피곤하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지만, 식물을 대하는 순간에는 피곤함을 잊는다. 살면서 순간순간 우울이 다가올 때, 마음이 출렁거리지 않도록 식물은 마음을 붙잡아 준다. 내가 식물을 돌보는 것이 아닌, 식물이 나를 돌보는 시점이다. 시간과 마음을 쏟는 만큼, 아니 그 이상의 것을 식물을 통해 보상받는지도 모르겠다. 아직까지는 식물과의 관계 형성이 잘 된 것 같다.
식물을 키우기 시작하며 동네를 돌 때마다 빠뜨리지 않고 들르는 곳이 있다. 바로 건물마다 있는 화원이다. 입구부터 손님들의 눈길을 사로잡을 만큼 식물이 손님을 끄는 집이 있는 반면, 무성하고 산발산 머리처럼 날 것 그대로의 자연을 보여주는 집도 있다.
주인장의 취향 또는 성향의 차이겠으나, 화원을 보며 우리 집의 식물을 떠올린다. 비교하다 보니 식물로 가득 찬 집이 어떻게 보일까, 집안의 식물은 또 어떻게 보일까 생각해 본다. 거창하게 플랜테리어까지는 아니더라도 산발한 머리는 내 스타일은 아니다. 식물을 돋보이게 하는 취향을 갖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지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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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개월 전 주워온 식물, 이렇게 감동을 주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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