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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대 진학, 군법무관 때 김송자씨와 결혼

[김삼웅의 인물열전 - 시대의 양심 한승헌 변호사 평전 5] 두 사람은 처가댁 마당에서 결혼식을 올리고 부부가 되었다

등록 2022.10.18 15:25수정 2022.10.18 1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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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승헌 변호사. 한승헌 변호사. ⓒ 오마이뉴스 유창재

 
6.25전쟁이 아직 끝나지 않은 1953년 4월 전북대학교 법정대학 정치학과에 입학했다. 감수성이 예민한 청년이 온전한 정신으로 공부에만 열중하기에는 사회가 너무 혼란한 시기였다. 이승만의 권력욕은 피난지 부산에서 정치파동을 일으켜 집권연장을 기도하고, 부정부패가 사회를 온통 오염시키고 있었다.

학비는 4년 내내 장학금으로 충당하고 숙식비 등은 고등학생 때의 필경사 경험을 살려서 교수들의 교재 원고를 등사원지에 필경을 하고 종이를 사다가 프린트를 한다음 제본까지 해서 학생들에게 팔았다. 대학교재가 흔치 않고 교수들도 저서를 내기가 쉽지 않았던 시절이라 프린트물로 강의 교재로 삼는 일이 많았다. 수입이 만만치 않았다.

봉사활동으로 1학년 때부터 법대의 학보(學報) 편집을 맡았다. 기획ㆍ원고청탁ㆍ취재ㆍ편집ㆍ교정까지 혼자서 해냈다. 문재(文才)가 있어서 교내 학술발표회 행사에서 논문으로, 또 전북일보사 공모 인권옹호상에 당선되었으며, 2학년 때는 대학신문('전북대학교보')의 창간 요원으로 활동하였다. 대학신문에 시와 수필을 쓰고, <전북일보>에 가끔 기고하여 신석정(辛夕汀) 시인으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았다. 

2학년 때 KBS 아나운서 시험에 응시했다가 낙방하고, 3학년이 되면서 졸업 후의 진로를 걱정하게 되었다. 고교 때부터 언론계 진출을 꿈꾸었으나 지방대 출신으로 쉽지 않을 뿐만 아니라 전란기의 언론계는 부패ㆍ타락ㆍ곡필이 횡행하고 있어서 거대한 탁류를 정화시킬 자신이 없어서 이를 접었다.

현실은 차가웠고, 지방대학 출신에게 취직의 문은 너무도 좁았다. 요즈음과 달라서 그때는 일자리가 너무도 한정되어 있었는 데다가 사바사바니, 빽이니 하는 요소가 작용하지 않고서는 취직이 힘들었다. 출신대학 여하간에 자력으로 생업을 갖는 일은 내가 그렇게도 하고 싶지 않았던 고등고시의 관문을 뚫는 길밖에 없다는 결론이 나왔다. (주석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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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법제도개혁추진위원회 제1차 회의가 18일 오후 서울 수송동 수송빌딩 회의실에서 공동위원장인 이해찬 총리와 한승헌 변호사를 비롯한 위원들이 참석한 가운데 열렸다. ⓒ 오마이뉴스 권우성

 
순전히 취업의 수단으로 뒤늦게 고시공부를 시작하여 첫 번째 응시에서 실패하고, 재수를 거쳐 1956년 두 번째 도전하여 합격했다. 1957년 1월 구술 시험을 거쳐 최종 합격자가 발표되고, 며칠 후 아버지가 53세의 창창한 나이에 사망하였다. 졸업식 날이 부친의 장례일이었다. 외아들을 위해 그토록 애쓰셨던 부친을 허망하게 보내면서 고시합격이나 대학졸업의 의미를 크게 잃었다. 

졸업 후 곧 육군에 소집되어 소정의 교육을 받고 군 법무관(중위)으로 입관되어 군법회의 업무를 맡았다. 1년 반의 후방 근무에 이어서 1958년 여름에 전방으로 가게 되었다. 15마일 휴전선 중 가장 지세가 험한 중동부전선에 있는 부대에 배속되었다. 그리고 1960년 4.19가 지난 뒤, 나는 3년 반 만에 예편을 하고 서울로 나왔다. (주석 2)

이 시기에 그는 군 법무관으로 군인재판의 재판장역을 맡았다. 그래서 판사ㆍ검사ㆍ변호사ㆍ피의자ㆍ증인을 두루 거친 한국사법사의 유일한 경력의 인물이 되었다. 육군 제3관구사령부 법무부 감찰과장으로 재직할 때(1958년 5월), 전북 완주군 봉동면 김종근의 무남독녀 김송자 씨와 결혼한다.


아내는 전북대학교 법정대학 동기생이지만 과는 달랐다. 나는 정치학과인데, 아내는 법학과였다. 서울의 한 여자대학(당시는 피난수도인 부산에 있었다)에 합격하고도 형편이 여의치 않아서 시기를 놓치고 전북대학교로 편입해 들어왔다. 중간 편입생이다보니까 학기 초의 강의노트가 필요했던지, 교무과의 여자 직원인 법대 선배로부터 몇 과목의 노트를 빌려달라는 청이 있었다. 그 여학생과의 직거래(?)가 아니라 그 선배를 거치는 간접 교류였다. 1학년 때는 과가 달라서 공통되는 교양과목이 몇 개 있어 같은 강의실을 드나들기도 했지만, 서로 말을 주고받는 일조차 없을 정도로 막혀있었다. (주석 3)

인연이 있어서인지, 두 사람은 처가댁 마당에서 결혼식을 올리고 부부가 되었다.

"아내는 나와 동갑이었는데, 생일이 나보다 한 달 빨랐다. 그래서 나는 아내를 '월상의 여인'이라고 소개하기도 한다. 아내는 나의 근무지에 따라, 대전에서도 살고, 휴전선을 눈앞에 둔 강원도 사창리 골짜기에서도 살았다. 신혼이라고 하기에는 불편이 많고 검소한 출발이었다. 그런가 하면, 고향에서 홀로 쓸쓸하게 살아가시는 어머니를 모시고 며느리로서 효성을 다하기도 하였다." (주석 4)

일반적으로 법조인의 아내가 되면 유복한 생활을 하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아내는 그런 통념과는 달리 각박한 살림에서 헤어나지를 못했다. 나는 이점에서 아내에게는 미안한 생각을 갖고 살아왔다. 

그런 중에도 내가 신상에 위험변수가 따르는 시국사범 변호사와 민주화운동에 나서는 것을 반대하지 않고 묵묵히 뒷받침해준 것도 나에게는 큰 힘이 되었다. 그리고 모든 것을 잘 감내하고, 불평불만을 삭여가며 살아온 아내의 성품과 덕성에 늘 감사하고 있다. (주석 5)


주석
1> <정치재판의 현실>, 37쪽.
2> <자서전>, 61쪽.
3> <자서전>, 391~392쪽.
4> 앞의 책, 393쪽.
5> 앞의 책, 394쪽.
덧붙이는 글 [김삼웅의 인물열전 - 시대의 양심 한승헌 변호사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한승헌 #시대의양심_한승헌평전 #한승헌변호사평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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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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