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동대교 북단 아래의 '뚝섬나루터' 표지석뚝섬 나루터에서는 송파와 청담동을 뱃길로 연결했다.
강대호
그 후 8년여가 지난 <조선일보> 1972년 12월 9일의 '새서울 영동 파노라마' 기사에서도 과거의 모습과 크게 달라지지 않은 강남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이 기사에서 강남은 "선정릉과 봉은사"가 자리 잡고 "크고 작은 50여 개의 구릉"이 있는 "도시 속의 농촌"으로 묘사된다. 한남대교가 놓이기 전에는 "버려진 땅" 아니면 "서울 시민들에게 야채를 대어주는 채소밭"이 많았고 주민들에게는 "농사가 생업"이었다고 소개한다.
특히 "압구정동, 청담동, 삼성동, 논현동, 학동, 대치동" 등은 "서울보통시"라는 별명이 붙었었다고. 이 지역에 사는 주민들이 서울 시내로 가려면 "청담 나루터에서 나룻배를 타고 뚝섬으로 건너"가 도심으로 가는 버스로 갈아타야 했기 때문이었다.
한편, 지하철 수인분당선 '압구정로데오역'의 이름이 '청수나루역'이 될 뻔 했었다. 역이 자리한 청담동에 나루터가 있었던 역사를 반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주민들 반대로 '압구정로데오'로 역명이 정해졌다.
배가 끊기면 헤엄쳐 건너야
강남의 옛 모습을 과거 신문에서 찾다 보면 지금은 상상하기 어려운 일들을 목격하곤 한다. <조선일보> 1970년 7월 17일의 '서울의 길 닦아온 25년 어느 과장의 사임'이라는 기사가 특히 인상 깊었다.
서울시청에서 25년 근무하고 퇴임한 오모 과장이 기사의 주인공이다. 그는 서울 도로 개발의 실무를 담당했던 서울시 도로포장과 과장이었다. 그런 오과장의 공적도 훌륭하지만, 그의 일화는 더 특별했다.
오과장의 집은 청담동에 있었다. 1973년에야 영동대교가 완공될 예정이니 당시 청담동 주민들이 서울 도심으로 가려면 멀리 한남대교로 돌아가거나 뚝섬에서 나룻배를 타야 했을 것이다.
오과장도 "25년간을 한결같이 나루를 건너 통근"했다고. 그런데 밤늦게 퇴근할 때 나룻배가 끊기면 "몇 번이나 헤엄쳐 건너야 했다"는 믿기 어려운 사실이 기사에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