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전 연 최옥경 화가.
최방식
그는 나주 태생이다. 의사 아버지와 교사 어머니를 둔 유복한 집안의 딸(2남 6녀의 여섯번째)로 태어났다. 초등학교 때 부친 작고로 가계가 쪼들리며 갑작스런 빈곤을 피할 수 없었다. 고교를 마치고 몰래 서울의 한 미대에 합격했지만 학자금이 없어 포기해야 했다. 교대(2년) 가라는 가족의 강권을 받아들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얼마나 방황했는지 생각만 해도 끔찍합니다. 염세에 빠졌고요. 하지만 현실과 타협이 불가피했어요. 둘째 언니가 음대를 중퇴(빈곤)하고 피아노 학원을 운영했는데, 거기서 알바를 했습니다. 미술을 접을 수 없어 이종상 교수(서울대 동양화과) 등을 만나며 꿈을 키웠죠."
그렇게 30대 초까지 등록금을 벌어 결국 미대에 들어갔다. 덕성여대 동양화과(1회)를 장학금을 받고 입학할 수 있었다. 이어 이화여대 교육대학원(미술교육)에서 석사 학위를 취득했다. 학원 등에서 알바(강사)를 하느라 그림 작업은 많이 할 수 없었다.
그는 어려서부터 예술에 관심이 컸다고 했다. 초등학교 5학년 담임교사가 "미술에 재능이 있다"며 미술대회 출전을 권했고, 거기서 상을 탔다. 중고교 때는 미술부 특활을 했다. 특히 교교시절 미술부 교사가 일본서 동양화를 전공한 덕에 4군자를 배웠고, 자연스럽게 동양화(한국화) 공부를 하게 됐다.
대학원을 졸업하고는 부업으로 초중고나 학원 미술 강사를 했지만 그림을 그리지는 못했다. 10여 년 화폭과 멀어졌던 그는 2000년 이후 예술혼을 다시 깨웠다. 남편을 따라 여주에 거주하던 시절 한 도예가에게 수업을 받기 시작한 것. 8년여 각고 끝에 전시회도 했지만, 지병인 류마티스가 도지며 그만둬야 했다.
그 뒤 펜션 사업을 시작했다. 갤러리를 만들려다 돈벌이가 여의치 않아 펜션으로 방향을 튼 것이다.
"화가들이 펜션 앞 강가에 와 야외스케치 하는 모습을 여러 번 봤어요. 너무 그림을 하고 싶었죠. 한국풍경화가회, 양평사생회 등에 가입해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작업을 그만 둔지 10여 년 만이죠. 두 가지를 하는 게 힘들어 보였던지, 남편이 펜션을 그만두라고 하더군요. 남편의 인테리어(건축) 사업도 괜찮았고요."
도자기·펜션 그만두고 다시 회화
2020년 그의 작품이 달라졌다. 풍경, 인물, 누드에서 마음으로 화폭 내용이 바뀐 것이다. 남편과 자신의 진보적 성향을 그림에 반영한 것. "1998년 이후 여주양평에 정착했는데, 보수라는 데 반민족이고, 북한을 주적으로 여기며, 노동자와 서민을 무시하는 가짜 보수를 바라보고만 있을 수 없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