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원 버스에서 내려 걷는 중입니다> 책표지
송성호
여기 자신만의 기준대로 삶을 만들어 가는 9년 차 커플이 있습니다. 사회가 제시하는 기준에 맹목적으로, 혹은 어쩔 수 없다는 식으로 따르기보다는 자신의 관점을 확립하는 게 먼저라는 그들. 똑같은 행동을 해도 타성에의 굴종이 아니라 주체성의 발현일 때 자기 자신다울 수 있다고 믿는 그들. 그들의 이야기를 담은 책이 나왔습니다. 저와 올해로 연애 9년 차에 접어든 영혼의 단짝인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만원 버스에서 내려 걷는 중입니다>는 조금은 '다르게' 살아가고 싶은 한 커플의 이야기를 담은 커플 에세이집입니다. 각자가 옳다고 생각하는 기준에 맞게 자신만의 삶을 꾸려 나가는 두 사람이 겪는 좌충우돌 일상과 그 속에서 피어난 생각과 감정을 솔직하게 기록한 책입니다.
반복된 우연이 만든 운명 같은 탄생
우연처럼 보이는 일이 계속되면 이것은 삶이 그 사람에게 보내는 일종의 메시지라고 생각합니다. 저희 커플에게도 어느 날 그런 작은 우연이 하나 찾아왔고, 저희는 그 우연의 요정이 뿌려놓은 길 위의 빵 부스러기들을 호기심을 가지고 주워갔습니다. 그 길의 끝에는 당시 평범한 직장인이었던 저희 둘은 상상도 하지 못했던 일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야기의 시작은 둘이서 부산으로 여행을 갔을 때로 돌아갑니다. 그때 제 짝꿍은 독립서점 구경하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트렌드에 따르는 대형 서점과는 달리 여러 작가의 창조성과 개성이 묻어나는 작품들을 볼 수 있는 곳이기 때문이죠. 그때도 어김없이 부산의 독립서점을 구경하는 게 여행 코스 중 하나였습니다. 그런데 방문을 계획했던 곳이 그날 하필 쉬는 날이었고, 별수 없이 근처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있던 다른 독립서점에 가게 되는 첫 번째 우연이 일어납니다.
서점의 입구엔 제가 좋아하는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의 한 구절이 저희를 맞이해줬습니다. 그때 혼자 속으로 이곳은 나와 잘 맞는 곳이라는 직감이 들었습니다. 다행히 직감은 맞아떨어졌습니다. 우연에 의해서 방문한 서점이었지만 그곳에서 느껴지는 분위기나 진열되어있는 책들이 모두 우리의 가슴을 저릿하게 하기에 충분했거든요.
그중 제 시선을 유달리 사로잡은 책이 한 권 있었으니, 어느 비혼 커플이 같이 살면서 든 생각들을 적었다는 에세이집이었습니다. 당시 저희도 연애한 지가 제법 됐고 나이도 찼는데 결혼에 대한 생각이 거의 없다시피 했기에 내용이 궁금했습니다. 책을 집어 들고 계산대에 갔는데 어쩐지 계산을 해주시는 사장님의 표정이 심상치가 않네요. 알고 보니 그 책은 사장님네 커플이 쓰신 책이었습니다. 이게 두 번째 우연입니다.
저희 둘은 여행에서 돌아가는 기차에서부터 읽기 시작하여 집에 돌아와서까지 그 책을 단숨에 읽었습니다. 그리고는 별안간에 여자친구가 한마디 하더군요. "우리도 책을 써볼까?" 저는 잠시 놀란 듯 물끄러미 그녀를 쳐다보다가 이내 씨익 웃으며 흔쾌히 그러자고 화답했습니다. 이게 세 번째 우연입니다.
2주쯤 지났을 때일까요, 둘이서 머리를 맞대고 어떤 메시지를 책에 담을지 회의도 하고 원고도 써보고 하던 차에 또 한 번의 우연이 일어납니다. 부산에서 들렸던 그 서점에서 독립출판 클래스를 열었다는 것입니다. 안 그래도 관련 경험이 전혀 없던 둘이서 오합지졸처럼 막막해하고 있었을 때였는데 기가 막힌 타이밍이었죠.
배움과 실전은 다르다, 언제나
강의를 듣는 동안 당장이라도 책을 출판할 수 있을 것만 같은 자신감이 한껏 부풀었습니다. 그러나 이론과 실전은 언제나 다른 법. 일단 글을 쓰기부터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수업이 진행되는 4주 안에 원고가 어느 정도 쌓인 수강생에게는 합리적인 가격에 샘플북 1권을 만들어 볼 기회를 제공해줬습니다. 저희는 본전을 뽑기 위해(?) 샘플북 인쇄까지 해보는 것을 목표로 잡고 수업이 진행되는 약 2주에 걸쳐 매일 하루에 2~3시간씩 미친 듯이 초고를 작성했습니다.
겨우 일정을 맞춰 샘플북을 받아봤을 때는 정말 신기하더군요. 우리가 쓴 글이 모여 한 권의 책으로 나오다니. 기쁨도 잠시, 부족한 점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초보자인 저희가 보기에도 고쳐야 할 점이 한둘이 아녔습니다. 표지의 색감, 표지와 본문의 글씨 폰트의 종류와 크기 등 외적인 요소부터 시작해서 글의 내용까지 마음에 들지 않은 것들이 속속들이 발견됐습니다.
작가와 편집자가 분리된 기성 출판 방식과 달리 독립출판은 하나부터 열까지 모두 직접 다 해야 했습니다. 저희 둘은 작가이자 표지 디자이너였으며, 편집자의 역할까지도 두루 겸해야 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진짜 힘든 과정은 역할이 많다거나 혹은 글을 써내는 창작 자체에 있지 않았습니다. 부족한 결과물을 만들어 낸 스스로에 대한 혐오와 그로 인한 자괴감과 싸우는 것이 몇 배는 더 힘든 일이었습니다.
글을 다시 고쳐 쓰고, 책의 인상을 좌우하는 여러 가지 시각적인 요소들을 수정해 나가면서 저희 둘은 싸우기도 많이 싸웠습니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자기가 만든 결과물과 자기 자신을 동일시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저희 또한 자기 글에 대한 상대의 피드백을 부지불식간에 자기 자신에 대한 공격으로 받아들여서 방어기제가 튀어나오곤 했습니다.
일정을 맞추기 위해서 피가 말리는 경험도 했습니다. 저희가 시작한 일이고, 누군가와 약속한 마감일이 있었던 것도 아닌데도 저희는 스스로 만든 마감일을 지키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냥 재미로 한 게 아니라 정말 진심으로, 작가라고 생각하고 임한 것이죠. 예상 밖의 고통의 순간들이 계속되느라 예정된 목표 마감일보다 약 2~3개월은 더 지나서 최종 결과물이 나올 수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