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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권교체 대의 위해 후보 사퇴

[김삼웅의 인물열전 - 월파 서민호 평전 45] "왜 나는 대통령 후보 지명을 수락하지 않았는가?"

등록 2023.02.12 17:19수정 2023.02.12 1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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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는 3선 금지 헌법의 성벽을 무너뜨렸지만 3선으로 가는 길이 쉽지만은 않았다. 그의 '10년세도' 장기집권에 우선 국민들이 혐오감을 갖게 되었다. 여기에 그동안 추진해온 경제개발이 특정지역·계층에 치우치고 빈부양극화 현상이 가속화된 데다 '혜성' 같이 나타난 야당의 젊은 후보가 도전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신민당은 3선개헌 저지에 실패하고, 이 과정에서 유진오 총재가 발병하여 일본 전지요양을 떠나는 등으로 능률적인 국정참여를 하지 못한 채 국회 출석을 거부하고 있었다. 

신민당은 70년 1월에 전당대회, 9월에 대통령후보 지명대회를 각각 개최하기로 결정했다. 전국대의원 606명이 참석한 시민회관의 전당대회는 단일지도체제의 당헌을 채택하고 새 당수에 유진산을 선출했다. 

신민당은 전당대회에 앞서 69년 11월 8일 원내총무 김영삼 의원 (당시 42세)이 돌연 '40대 기수론'을 제창했다. 김대중 의원(당시 45세)도 70년 1월 24일 대선 출마를 선언하고 이철승(당시 48세)이 뒤따라 출마를 선언함으로써 '40대 기수'의 3파전으로 대통령 후보가 압축되었다.

'40대 기수론'에 대해 당내 일각에서는 거센 반발이 제기되었다. 특히 유진산 당수는 대통령후보가 40대라야 한다는 것은 '구상유취'한 것이라면서 맹타를 가하기 시작했다. 젖비린내 난다는 노골적인 험담이었다.

그러나 '40대 기수론'은 거역할 수 없는 당내외의 대세로 굳어져갔다. 신민당 대통령후보 지명대회가 9월 29일 서울시민회관에서 개최되었다. 

막강한 주류의 세와 유진산 당수 지명의 힘을 업은 김영삼이 후보에 선출될 것으로 예상되었다. 이날 일부 석간신문은 '김영삼 후보 지명'을 머릿기사 제목으로 뽑기도 했다.


그러나 지명대회의 결과는 의외였다. 1차투표 결과, 총투표수 885명 중 김영삼 421표, 김대중 382표, 무효 82표였다. 이철승의 지지표가 무효로 나타난 것이다. 2차투표의 결과는 더욱 의외였다. 김대중 의원의 역전승으로 대세가 완전히 바뀐 것이다. 총투표자 884명 중 김대중 458표, 김영삼 410표, 무효 16표로 김대중이 대통령후보에 지명되었다.

전당대회에서 대통령후보에 지명된 김대중은 "군정종식과 민주화 시대의 개막"을 위해 모든 노력을 다하겠다고 밝혔으며, 패배한 김영삼은 "나와 같은 40대 동지의 승리는 신민당의 승리요, 바로 나의 승리"라고 하면서 대통령선거에서 협력을 다짐했다.


한국정치사에서 가장 드라마틱하게 전개된 이날 전당대회의 결과는 야당의 깨끗한 경선과 함께 김대중·김영삼이라는 참신한 정치지도자를 배출한 의미 깊은 대회로 기록되었다. 

신민당이 71년 4월 27일에 실시되는 제7대 대통령 선거전에 김대중 후보를 지명하여 선거운동에 나선 데 반해 공화당은 일선조직 강화에 열중하였다. 이미 3선개헌을 통해 박정희가 대통령후보에 내정된 것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후보지명 절차는 요식행위에 불과했다.

그러나 당헌상 지명대회를 거치지 않을 수는 없었다. 3월 17일 지명대회를 가진 공화당은 박정희 총재를 또 다시 만장일치의 찬성으로 대통령후보에 추대했다. 

서민호는 1971년 대통령 선거에 한가닥 기대를 걸었다.

박정희 정권의 정치적 야욕이 3선개헌을 통해 속내를 드러나고, 신민당의 극심한 파쟁에 국민이 실망하여 비록 당세는 영세하지만 이념과 정책에서 차별성이 뚜렷한 자신과 대중당을 지지하리라 믿었다.

대중당은 3월 4일 전당대회를 열어 대통령후보로 서민호를 다시 지명하였다. 그동안 쌓아온 다양한 업적과 갈고 닦아온 경륜을 펼쳐보았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하지만 이상과 현실에는 간극이 심했다. 대선정국은 집권당 박정희 후보와 제1야당 김대중 후보로 압축되어가고 있었다. 고심의 시간이 길었다. 

4월 1일 <왜 나는 대통령후보 지명을 수락하지 않았는가?>란 성명을 통해 자신의 소신을 발표했다. 

왜 나는 대통령 후보 지명을 수락하지 않았는가?

우리는 역사적인 대전환을 목전에 두고 냉정한 자아비판과 굳센 정신무장을 해야할 때가 왔다.

국가백년대계에 다시 한 번 오점을 남기지 않기 위해서 우리 국민들은 참된 애국에의 길을 모색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원래 애국에서 길이란 수난과 자기희생의 길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이 중요한 시점에서 또 다시 이 길을 택해야 할 깊은 사명감을 갖게 되었다. 

이 나라 민주수호를 위해 그 많은 탄압과 곤욕을 당해야 했던 인간 서민호가 어찌 국민의 열망인 정권교체의 숙원을 풀어주기 위해 이 한 몸을 던지는 데 주저하겠는가.

과거 긴 옥고를 치루면서도 내 국가와 내 민족을 잊은 적은 없었다. 오직 내 생애는 구국을 위해 바쳐야하겠다는 신념이 더욱 굳어졌을 뿐이다. 나는 이 불굴의 신념으로 투쟁대열에 앞장 설 것을 결심함과 동시에 야당 단일후보를 호소하는 바이다.

△ 3선개헌의 불법처리가 현실화되었다고 하지만 이것을 재확인하는 결과가 되므로 이 선거를 원칙적으로 거부해야 하겠지만 이제 피할 수 없는 기정사실이므로 민주적인 방법으로 이 불법성을 규탄할 것을 재야 정치인과 국민 앞에 호소한다. 

△ 4년 전에 국민이 바라는 야당 단일후보를 위해 입후보를 사퇴하였으나 패배의 쓴 맛을 보게 되었던 것이다. 이는 우리가 뭉치지 못했던 분산의 소치라 생각되므로 이번에는 좀 더 고차적인 자세로 선거전에 임할 수 있는 확고한 태세가 갖추어 주기를 국민에게 호소한다.

△ 국민이 원하는 단일 후보로서 사사로운 권익을 버리고 일심단합해 줄 것을 재야 정치인에게 호소한다. 나는 신민당의 비정을 모르는 바 아니고 국내 유일한 혁신정당으로서 당연히 입후보를 해야할 책임이 있지만 개인이나 당보다 국가와 민족이 더 우위이므로 눈물을 머금고 이런 방향을 택하는 것이다.

내가 이러한 구국의 대열에 앞장서므로 해서 어떤 불의의 사태가 일어날 지 모르지만 나를 따르는 당원 동지들과 정권교체를 열망하는 국민들은 나와 같은 대열에 서서 최선의 민주역량을 발휘해 줄 것을 간절히 바라는 바이다. (주석 1) 


주석
1> <동아일보>, 1971년 4월 1일.

 
덧붙이는 글 [김삼웅의 인물열전 - 월파 서민호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서민호 #월파_서민호평전 #월파서민호평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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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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