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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중앙방송 대본 원고, 직접 쓰고

[김삼웅의 인물열전 - 시대의 상식인 김자동 평전 12] 결국 내가 많은 일을 도와드릴 수밖에 없었다

등록 2023.03.02 16:14수정 2023.03.02 1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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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농 김가진과 아들 김의한, 며느리 정정화, 손자 김자동. 손자 김자동(88)은 현재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 회장을 맡고있다. ⓒ 서울역사박물관

 
일제가 1937년 7월 7일 중일전쟁을 도발한 이래 국제정세는 요동치고 있었다.

1938년 3월, 독일의 오스트리아 합병, 10월 일본군 광동 점령, 1939년 8월 독일·소련 불가침조약, 9월 제2차 세계대전, 1940년 6월 독일군 프랑스 파리 점령, 9월 일·독·이 3국 군사동맹, 1941년 4월 일·소 불가침조약, 6월 독일군 소련 기습, 12월 일본군 진주만 기습, 태평양전쟁 발발, 1943년 2월 독일군 스탈린그라드에서 항복, 9월 이탈리아 연합군에 항복, 11월 카이로회담과 테헤란회담, 1944년 6월 연합군, 노르망디 상륙, 8월 연합군 파리 해방.

조숙했던 김자동은 어려서부터 신문·잡지를 읽었다. 망명자 부모가 내외정세에 민감하고 신문·잡지를 열심히 보았던 영향일 터이다. 

"나는 어릴적부터 신문이나 잡지 보는 것을 좋아했다. 내가 소학교 다닐 때, 시사잡지에서 이탈리아 무솔리니의 에티오피아 침공 기사를 읽으며 분개했었다. 달려가서 그들과 같이 싸워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때부터 그는 남의 나라를 무력으로 침략하는 일본제국주의나 나치즘, 파시즘 등에 대해 적대감을 갖기 시작했다. 또래에 비해서 조숙한 편이었다고 할까." (주석 1)

성장하면서 신문·잡지에 대한 관심은 더욱 많아졌다. 충칭의 학교에 다니면서도 <대공보> <중앙일보> 등 국민당기관지는 물론 당국이 배척하는 공산당 기관지 <신화일보>도 구해 읽었다. 국제정세와 새로운 정보를 얻기 위해서였다. 또 <세계지식>이란 월간지를 탐독했다. 상하이의 한 신문사에서 발행하는 이 잡지는 세계 곳곳의 지식과 국제정세를 쉽고 재미있게 소개하였다.

국제정세와 일제침략 전쟁의 흐름을 지켜보면서 자신도 아버지와 같이 광복군이 되고자 하였다. 중학교 3학년 시절에 학생의용군에 지원했으나 부모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한 적이 있었다.


"평소 시사문제에 관심이 많았기에 나는 일본이 2년 이상 버티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그렇다면 일본이 패망하기 전에 조국을 위해 총을 들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나는 부모님께 광복군에 입대하고 싶다고 했다. 그런데 부모님은 내가 고중高中(고급중학)을 졸업한 후에 다시 얘기하자고 했다. 나로선 서운했지만 말씀을 따르기로 했다. 부모 입장에서는 나이도 많지 않은 외아들을 군에 보내기가 선뜻 내키지 않았을 것이다." (주석 2)

김자동의 아버지는 광복군 정령(正領, 대령)이었다. 조직부 주임을 하다가 정훈처 선전과장을 겸직하였다. 광복군 창설 당시는 인력이 크게 모자랐다. 그래서 아들의 도움이 필요했다. 아들은 어려서부터 글짓기를 좋아하고 문장력도 있었다.


그런데 아버지가 막상 광복군 선전 일을 맡고보니 업무가 많아 광복군 총사령부 쪽으로 매일 출근하다시피 했다. 당시 광복군에서 한국에 있는 동포들을 상대로 한국말 단파방송을 했다. 아버지가 총책임자였다. 여기에 광복군 선전 잡지와 한독당에서 발행하는 간행물 몇 종까지 책임을 지다보니 업무가 많은 건 당연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광복군 총사령부에 가 계시니 한독당 일은 돌볼 시간이 부족했다.

결국 내가 많은 일을 도와드릴 수밖에 없었다. 간행물 중 철필로 글씨를 써서 등사기로 미는 것들은 거의 내 몫이었다. 80년대에도 그 철필이 남아 있었는데 이사를 다니면서 없어졌다. (주석 3)

아버지 김의한의 망명시기 삶의 대감을 국가보훈처 공훈록에서 살펴본다. 

△ 1928년 6월 상해에 있던 중국본부한인청년동맹의 상해지부 조직에 참가하여 재정위원으로 활동하였으며, 1932년 5월 윤봉길 의사 의거로 포악해진 일제의 탄압을 피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상해에서 항주 등지로 이동할 때 김구 주석과 함께 동행하면서 임시정부 선전위원으로 활동하였다.

△ 1934년 1월 안공근(安恭根)·이동녕(李東寧) 등과 함께 애국단(愛國團)의 일원으로 활동하였으며 낙양군관학교 분교 내의 한인군관학교와 의열단 계열의 군관학교에도 관여하면서 독립군 양성에 힘썼다. 1939년 10월 임시정부 비서처의 비서와 선전위원으로 활동하면서 특히 충칭방송국을 통하여 국내에 있는 한인들에게 선전활동을 전개하였다.

△ 1940년 5월 조선혁명당·한국국민당·한국독립당의 3당이 통합하여 신당인 한국독립당을 창립할 때 감찰위원회 위원과 상무위원 겸 조직부 주임으로 활동하였다. 또한 1940년 9월 임시정부가 충칭으로 이전한 후 중국 국민당 정부로부터 광복군 활동에 대한 공식적인 동의를 얻게 되자 광복군총사령부 주계(主計, 회계책임자)에 선임되었다.

△ 1943년 8월에는 광복군 조직훈련과장을 맡았고, 1945년 6월에는 정훈처 선전과장으로 광복군 활동에 참가하였다. 1941년 12월 27일 임시정부 외무부 부원에 선임되었으며 한편으로 외교연구위원회 위원이 되어 활동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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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시정부 요인들과 가족들이 찍은 기념사진. 앞줄 왼쪽에서 두번째가 정정화 선생과 김자동 선생(당시 6세). 뒷줄 오른쪽에서 세번째가 김구 선생, 여섯번째가 김의한 선생이다. ⓒ 김선현

 
중학교 3학년이던 김자동은 아버지의 대일방송 원고를 직접 썼다.

당시 방송은 충칭 시내 량루커우에 있는 중국 중앙방송국에서 했다. 방송 시간은 한 시간 안팎이었다. 아나운서가 따로 없어 아버지가 직접 원고를 들고 방송을 하셨다. 그 대본 원고를 대부분 내가 썼다. 아버지가 이러이러한 내용으로 쓰라고 요점을 얘기해주면 내가 원고를 작성했다. 창사 임시학교 시절 송면수 선생님으로부터 맞춤법을 제대로 배워둔 덕분에 정확한 원고 작성이 가능했다. 당시 나는 중 3학년이었지만 임정 가족들 가운데 내 또래  애들을 모아놓고 우리말 강의를 하기도 했다. 광복 후 귀국해서도 국어는 국내에서 배운 애들 보다 조금도 떨어지지 않았다. 

당시 방송을 하면서 이 방송을 누가 어디서 들을지 늘 궁금했다. 그때만 해도 라디오 보급률이 낮아 청취자가 그리 많지 않았다. 또 국내도 아닌 중국땅 충칭에서 송출하는 방송이니 과연 제대로 들릴지도 의문이었다. 그런데 그 방송을 들었다는 사람을 우연한 기회에 만났다. 부산 피난 시절, 미군부대에서 통역을 뽑는다고 해서 부산 초량동 근처 모 여학교에 시험을 보러 갔었다. 그때 나랑 같이 뽑혀 미군 통역 생활을 한 문일영(文一英, 만주광명중학 출신으로 나중에 합동통신·동양통신 기자 역임)이라는 친구가 있다. 그가 만주에서 그 단파방송을 들었노라고 증언했다. 내가 대본을 쓴 방송을 들은 사람이 있었다니 기분이 매우 좋았다. (주석 4)


주석
1> 앞의 책, 69쪽. 
2> 앞의 책, 72쪽.
3> 앞의 책, 97쪽.
4> 앞의 책, 79쪽.
덧붙이는 글 [김삼웅의 인물열전 - 시대의 상식인 김자동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김자동 #김자동평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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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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