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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자동, 미군 수송선 타고 고국으로 돌아와

[김삼웅의 인물열전 - 시대의 상식인 김자동 평전 14] 1919년 할아버지를 모시고 망명한 아버지는 무려 27년 만에 집으로 돌아온 셈이었다

등록 2023.03.04 12:03수정 2023.03.04 1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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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시 의정원 1942년 10월 제34차 임시의정원 기념사진. 앞줄 왼쪽에서 다섯째가 김구 임시정부 주석, 둘째줄 오른쪽에서 넷째가 김자동의 부친 김의한이다. ⓒ 김자동

 
임시정부 요인들은 미국의 도움을 받아 항공편으로 환국했지만 임정의 나머지 직원·가족과 일반 교민들은 해방 이듬해 1월 중순에 충칭을 출발하여 상하이로 떠났다. 전쟁 직후라 아직 질서가 잡히지 않고 교통사정이 불편했다.

임시정부 요인들이 환국하기 전 1945년 9월 김자동의 아버지와 독립운동가 조시원을 상하이로 급파하여 교민사회 질서 유지와 민심수습에 나서도록 하였다. 상하이는 우리 임시정부가 출범한 곳이고 김자동이 태어난 고향이다.

김자동은 어머니와 임정 가족들과 함께 버스와 기선을 이용하여 난징에부터는 기차를 타고 2월 19일 상하이에 도착했다. 그는 14년 만에 '고향'에 돌아온 셈이다. 유아기 때 떠났다가 청년이 되어 돌아온 것이다. 상하이 역시 전후의 혼란상은 중국 여느 도시와 다르지 않았다.

상하이에 다시 만난 가족은 만국공묘로 할아버지 묘소를 찾았다. 정정화의 기록이다. 

아버님 묘소를 돌아서며 나는 마지막으로 아버님께 다짐했다.
아버님, 저희는 곧 고국에 발을 디딥니다. 아버님을 함께 모시는 것이 순서이겠으나 사정이 여의치 못한 탓으로 우선 저희가 먼저 아버님께서 물려주신 독립 조국의 하늘을 부끄러운 낯으로나마 대하게 되었습니다. 돌아가는 대로 곧 차비를 챙겨 아버님을 다시 뵙고 모시기로 하겠습니다.

저희 곁에 이렇게 서 있는 청년이 바로 아버님의 손(孫)입니다. 아버님 세상을 뜨시고 여섯 해 지난 후에야 후동이를 보았습니다. 아버님 살아 생전에 손을 보여드리지 못한 것이 마냥 죄스러우면서도 아버님 남기신 가르침이 헛되지 않게 애써 가르치고 키웠다고 자부하기도 합니다. 이제 그 손이 아버님의 나라 섬기시던 그 뜻을 받들어 삼천리강토의 앞날을 지킬 수 있도록 저희 미력을 다하겠습니다. (주석 3)

고국으로 가는 여객선이 따로 없었고 유일하게 미군의 수송선이 있었을 뿐이다. 김자동 가족을 비롯 임시정부 인사들과 그 가족은 이 수송선을 타고 귀국길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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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농 김가진과 아들 김의한, 며느리 정정화, 손자 김자동. 손자 김자동(88)은 현재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 회장을 맡고있다. ⓒ 서울역사박물관

 
1946년 5월 9일, 우리 식구는 짐을 챙겨 다른 임정 가족들과 함께 상하이 부둣가로 나갔다. 부둣가에는 귀국선을 타려는 사람들로 인산인해였다. 복장이나 차림새나 전형적인 피란민 모양새였다. 짐 보따리 무게는 오십 킬로그램으로 제한했다. 우리는 짐이라고 해야 옷가지 몇을 싼 꾸러미가 전부였다. 부둣가 사람들 가운데 계급장을 뗀 군복차림의 청년도 많이 있었다. 징병이나 학병으로 일본군에 끌려갔다가 무장해제된 후 귀국하는 '패잔병'들이었다.


마침내 우리는 귀국선에 몸을 실었다. 그런데 말이 좋아 귀국선이지 난민선이라 마찬가지였다. 가수 이인권이 부른 '귀국선' 노래처럼 희망적이고 낭만적인 그런 배가 아니었다. 우리가 탄 배는 팔천 톤 급 미군 LST(Landing Ship Tank)였다. 군용 수송선이라는데 가축이나 짐짝을 싣는 배 같았다. 배 안팎이 지저분하고 불결하기 짝이 없었다. 그런 배에 줄잡아 수천 명이 뒤엉켜 타고 바다를 건너왔다. (주석 4)

임정요인들이 환국했을 때도 공항에 환영객 하나 없었는데 가족들의 귀국에 마중나올 사람이 있을 리 없었다. 상하이를 떠난 지 사흘만인 12일 부산항에 도착하여 임시난민수용소에 인도되었다. 방역주사를 맞고 미군 병사들이 DDT를 온몸에 뿌렸다.

세 살적에 어머니 품에 안겨 잠시 고국땅을 밟았지만 기억에 없고, 처음 딛는 고국이었지만, 모두 거지꼴을 하고 나타난 독립운동가 가족들에게 고국은 낯설었다. 부산역에서 기차를 타고 서울역에서 내려 막내삼촌이 사는 혜화동까지 걸었다. 모두 지칠대로 지친 상태였다. 

1919년 할아버지를 모시고 망명한 아버지는 무려 27년 만에 집으로 돌아온 셈이었다. 열아홉 살 청년은 어느새 40대 중반의 장년이 되어 돌아왔다. 마지막으로 고국을 다녀온 어머니에게는 16년만의 귀환이었다. 집에 돌아온 두 분의 심경이 어떠했을 지 짐작이 가고도 남았다. (주석 5)

서울역에서 그동안 고초를 함께해온 독립운동 가족들과 헤어졌다. 이북이 고향인 사람들은 다시 북행길을 재촉하였다. 아직 38선이 군사분계선으로 굳어지기 전이다. 일행 중에는 의열단장 약산 김원봉의 부인이 어린 아들과 함께하고 있었다. 또 독립운동가 우강 최석순 부부와도 헤어져야 했다. 

김자동 가족을 비롯 독립운동가 가족이 부산항에 도착했을 무렵 톈진에서 귀국선 LST를 타고 온 한국인들이 있었다. 그 중에는 훗날 유별난 인물도 섞여 있었다.

그 배에는 계급장을 뗀 군복차림에 긴 군도(軍刀)를 찬 한 사나이가 타고 있었다. 영락없는 패잔병 몰골이었다. 나중에 대통령이 된 박정희였다. 문경에서 보통학교 교사를 하다가 만주로 건너가 군관학교와 일본 육사를 졸업한 그는 만주군(일제의 괴뢰인 만주국 육군) 장교로 있었다. 해방 후 박정희는 베이징으로 내려와 광복군에 몸담았다. 그런데 그 광복군은 '해방 후' 광복군이어서 그를 광복군 출신이라고 할 수 없다. 해방 당시 박정희는 만주군 보병 8단 소속으로 계급은 중위였다. (주석 6)


주석
3> 정정화, 앞의 책, 263~264쪽.
4> <회고록>, 122쪽.
5> 앞의 책, 135쪽.
6> 앞의 책, 124쪽.
덧붙이는 글 [김삼웅의 인물열전 - 시대의 상식인 김자동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김자동 #김자동평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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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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