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사신을 대접했던 모화관을 헐고 새로 지은 독립관. 이곳에서 애국토론회를 개최하여 자주, 민권, 자강 사상을 고취했다. 독립관은 일제에게 철거되는 비운을 겪다가 1997년이 되어서야 다시 복원되었다.
최서우
일제강점기 때 독립문은 어떻게 보면 일제의 눈엣가시로 보일 수도 있었는데, 철거하지 않은 이유가 있다. 우리 입장에서는 씁쓸한 이유인데, 일본이 청일전쟁에서 이겨서 조선을 청에서 독립시켰다는 프로파간다로 이용하기 위해서였다. 물론 광복 후에는 독립협회가 바랐던 본연의 정신 그대로 계승되어 현재에 이른다.
문 뒤편에는 독립협회와 독립문 건립에 적극 힘썼던 서재필의 동상이 있다. 그의 인생도 인상 깊은데, 약관의 나이에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등과 함께 갑신정변을 일으킨다. 하지만 3일 천하로 끝난 후 연좌제에 엮여, 본인과 일부 친척을 제외하고 가족이 몰살당하는 아픔을 겪었다.
이후 미국으로 망명하여 의사가 된 서재필은 필립 제이슨(Philip Jaisohn)으로 개명하고 미국 시민권을 획득한다. 이후 갑오개혁 때 갑신정변 주동자에 대한 사면령이 이뤄져 다시금 조국 땅에 올 수 있었다. 이때 바로 독립협회 활동을 하며 독립신문을 창간한 것. 하지만 대한제국 정부와 관계가 틀어지면서 미국으로 다시 돌아간다. 이후 자신의 거처인 필라델피아에서 3.1 운동에 참여한 후 의사 일에 매진하며 살았다.
가족을 몰살했던 조선 조정에 환멸감을 느껴 미국인이 된 것이 아닐까? 독립협회에서 활동할 때는 한국말을 거의 안 썼다니까. 하지만 친일로 변절한 박영효와 달리 원한을 극복하고 조선 독립에 힘썼기에 생애 마지막 즈음에 해방된 조국 땅을 밟을 수 있었다. 젊을 때는 열혈 개화파였지만, 세월의 풍파를 겪으며 원숙함이 더해진 인생이 아니었냐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