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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명 높은 인도 기차, 이젠 걱정 말아요

[인도] 아그라의 타지마할 그리고 지금 이 순간

등록 2023.04.11 13:10수정 2023.04.11 1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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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치 스투파를 본 다음날, 저는 보팔 역에서 기차를 타고 이동합니다. 열차는 계획된 시간보다 세 시간을 연착해 보팔 역에 도착했습니다. 여행자들에게 인도의 기차는 악명이 높죠. 장기 여행자라면 인도에서의 기차 연착에 대한 일화는 하나쯤 가지고 있더군요.

하지만 요즘에는 스마트폰 앱으로 손쉽게 기차의 연착 현황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저도 연착된 시간에 맞춰 늦게 숙소에서 나왔습니다. 덕분에 플랫폼에서 오랜 시간을 낭비할 일은 없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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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그라 역 ⓒ Widerstand


저는 그렇게 별 무리 없이 아그라 역에 도착했습니다. 그렇게 아그라에 도착하고 나니, 역은 왜 그리 깔끔해 보이던지요. 곳곳에 달려 있는 안내판도 뭔가 현대적인 느낌입니다.


역 앞의 오토릭샤 기사들과 씨름하기 싫어 우버 앱을 켜 봤습니다. 호출 버튼을 누르고 1분도 지나지 않아 응답이 왔습니다. 예전에도 앱을 이용해 보기는 했지만, 이렇게 빠르기는 처음입니다. 내가 도시에 왔다는 느낌을 받는 순간이었습니다.

사실 아그라는 그리 큰 도시는 아닙니다. 아그라의 인구는 150만명 정도입니다. 얼마 전 중국을 추월해 세계 최고가 된 인구 대국 인도에서는, 많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아그라가 속한 우타르프라데쉬 주의 인구만 2억 4천만이 넘으니까요. 도시 인구 순위로 아그라는 20위권 안에도 들지 못합니다.

하지만 제가 아그라가 도시라 느낀 것은 분명 이유가 있겠지요. 여행자를 위한 인프라가 잘 되어 있기 때문일 겁니다. 북인도를 여행하는 여행자들은 대부분 아그라를 거쳐 가니까요. 거의 전부라고 말해도 될 겁니다. 아그라는 타지마할이 있는 도시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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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지마할 ⓒ Widerstand


저도 도착 다음날 바로 타지마할과 아그라 성을 관람했습니다. 이전에도 아그라를 수도로 삼은 왕조가 있었지만, 본격적으로 아그라가 개발된 것은 역시 무굴 제국 시대입니다. 대부분 아시다시피, 무굴 제국은 인도에 존재했던 이슬람 왕국입니다. 하지만 '무굴'이라는 말은, 의외로 '몽골'에서 온 말입니다.

갑자기 몽골이라는 이름이 나오니 뜬금없다고 생각하실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초원 세계에 몽골 제국이 남긴 영향력은 막대하지요. 무굴 제국 역시 그 정통성을 몽골에서 찾았습니다.

14세기 서남아시아에는 칭기스칸 가문의 사위로, 몽골계와 튀르크계를 통합한 '티무르(Timur)'라는 지도자가 있었습니다. 이 티무르의 5대손이 바로 무굴 제국을 세운 바부르(Babur)지요.


물론 칭기스칸과는 아주 먼 친족이지만, 정통성이라는 것이 꼭 그리 합리적으로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니까요. 이들은 자신이 세계제국 몽골의 후예라는 점을 내세웠습니다. 실제로 무굴 제국은 중앙아시아의 몽골계나 투르크계 국가와 적극적으로 교류했죠. 사실 어떤 의미에서 바부르에게 인도는 초원 지대를 잃고 찾아온 피난처이기도 했고요.

사마르칸트를 잃고 카불에 거주하던 바부르는 1526년 델리 일대를 장악하고 무굴 제국을 세웠습니다. 하지만 정작 무굴 제국이 성립되고 그는 4년 만에 사망합니다. 그의 뒤를 이은 후마윤은 지방 세력에 쫓겨 한동안 이란으로 도주해야 했습니다. 후마윤 이후 델리를 되찾았지만 1년 만에 사망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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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지마할 옆의 메흐만 카나 ⓒ Widerstand


결국 인도의 역사로서 무굴 제국이 본격적으로 자리한 것은 3대 황제인 악바르 시대부터였습니다. 악바르는 무굴 제국의 수도를 아그라로 옮겼습니다. 무굴 제국의 전성기가 여기서부터 시작되죠.

무슬림이 아닌 이들에 대한 유화책이 실시되었고, 화려한 건축예술이 발달했습니다. 주변 지역을 넘어서 서양과의 무역도 적극적으로 이루어졌죠. 인도사에서 최초로 일률적인 제국이 탄생했다고 보기도 합니다. 중국에서 명나라가 무너지고 있던 시점에서, 당대 아시아 최강의 국가이기도 했죠. 무굴 제국의 전성기는 악바르의 뒤를 이은 자한기르와 샤 자한의 시대까지 이어집니다.

바로 이 샤 자한이 세운 건축물이 바로 타지마할이죠. 아내인 뭄타즈 마할(Mumtaz Mahal)의 영묘로 만들어진 건물입니다. 전체적인 양식은 무굴 제국의 다른 건축물과 흡사하지만, 붉은 사암이 아니라 흰 대리석을 사용했다는 점이 가장 큰 특징입니다. 약 22년 간 막대한 자원을 동원해 만든 건축물이죠.

하지만 당연히도, 대규모 건설 사업은 국력을 약화시키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샤 자한 시대 무굴 제국은 최대의 영토를 차지했지만, 그 역시 국력을 소모한 대가였습니다. 내부적인 반발은 극한에 이르렀고, 결국 샤 자한은 아들 아우랑제브의 쿠데타로 실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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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 자한이 유폐된 아그라 성 ⓒ Widerstand


아우랑제브는 왕위에 오른 뒤, 수도를 아그라에서 델리로 옮깁니다. 그리고 무굴 제국의 전성기도 함께 끝을 맺습니다. 아우랑제브는 남방 원정을 시도하며 남인도로 영토를 넓혔지만, 분열을 막을 수는 없었습니다.

독실한 무슬림이었던 그는 이교도를 철저히 차별했습니다. 종교적 관용은 소수의 무슬림이 다수의 힌두교도를 지배할 수 있도록 한 정책적 기둥이었습니다. 하지만 아우랑제브 시대에 이르러 그 기둥은 붕괴했죠. 각지에서 반란이 빈발했고, 아우랑제브는 남인도의 전쟁터에서 죽었습니다.

이후 계승 분쟁과 함께 무굴 제국의 영향력은 축소됩니다. 각 지역에서 지방 정권이 성장했죠. 무굴 제국의 영광은 복원되지 못했습니다. 인도 서부에서 성장한 마라타 제국이 델리를 장악했고, 무굴 제국은 사실상 마라타 제국의 보호국으로 전락했습니다. 결국 타지마할은 무굴제국 전체의 몰락을 알린 신호탄이었던 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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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지마할 ⓒ Widerstand


사실 저는 타지마할이 명성에 비해 그닥 뛰어난 건축물이라고 느끼지는 못했습니다. 물론 뚜렷한 대칭과 백색의 대리석은 아름답습니다. 하지만 대칭이 아름다운 것은 다들 아는 사실이죠. 흰 대리석도 지금의 입장에서 보면 조금 뻔하다고 할까요. 현대에는 얼마든지 더 화려한 건물을 만들 수도 있습니다.

지나치게 현대적인 시선이라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 과거의 작품을 지금의 입장에서 판단하는 오류라고 말할 수도 있겠습니다. 역사를 현대의 시선에서 판단하는 것은 때로 아주 위험한 일이 되기도 하니까요. 하지만 저는 역사를 공부하는 사람이면서도, 아직 그 습속을 잘 끊어내지 못했습니다.

저는 여전히 내재적 입장에서 역사를 바라보는 것만큼, 지금 이 순간 제가 바라보는 시선도 소중하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발 붙이고 살고 있는 현재의 시선과 입장을 무시하고 싶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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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지마할의 돔 ⓒ Widerstand


타지마할은 죽은 황후를 기리며 만든 영묘입니다. 언급했듯 무굴이라는 거대한 제국이 종말을 맞기 시작한 공간이기도 합니다. 화려하지만, 몰락과 죽음의 이미지가 가득한 공간입니다.

역설적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다만 저는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화려한 건물 앞에서, 지금 이 순간의 가치를 떠올렸습니다. 지금 여기 살아 서 있는 저의 현재와 지금을 생각했습니다. 위험할 수 있어도, 제가 살고 있는 이곳의 시선을 놓치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아그라에 도착할 때부터 인도의 현대적인 분위기를 느꼈기 때문일까요. 어쩐지 과거의 유적 속에서 자꾸만 지금의 인도를 생각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현재에 충실하지 못했던 타지마할이라는 건축물의 미감에, 왠지 자꾸 딴지를 걸고 싶어지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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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그라 성 ⓒ Widerstand


타지마할은 아름답습니다. 그걸 부정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다만 이 작품의 지금의 우리에게 갖는 의미가, 아무리 생각해도 공허하게 느껴졌습니다. 오히려 저는 아그라 성의 높다란 성벽과 화려한 정원이 더 의미 있게 다가왔습니다. 숨쉴 틈 없는 뚜렷한 대칭의 영묘보다는, 사람이 살았던 성의 모습이 더 화려했습니다.

타지마할은 분명 만들기 어려운 건축물이었습니다. 당대로서는 최고의 미적 성취를 가져온 작품이었겠죠. 오히려 아그라 성의 미적 가치를 생각한 사람은 적었을 것입니다. 특히 제가 인상깊게 본 아그라 성의 높은 성벽은, 미적 가치보다는 군사적이고 실용적인 용도에 초점을 맞춰 만들어졌을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2023년에 사는 제가 두 건물을 보고 느낀 감정을 소중히 하고 싶습니다. 이 미적 경험을, 400년 전 당대인의 시선에 맞춰 무시하고 싶지 않습니다. 역사학에 걸맞는 태도는 아닐지 모르겠습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저는 우리 시대의 미학적 진보에 예의를 표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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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그라 성에서 보이는 타지마할 ⓒ Widerstand


아그라 성의 정원에서는 멀리 타지마할이 보입니다. 주변 지역이 도심지로 개발되지 않은 탓에, 타지마할 주변은 여전히 푸른 초원의 모습입니다. 400년 전에도 그랬을 듯한 몽환적 풍경입니다. 400년 뒤에도 이 풍경이 크게 달라지지 않을 것 같다는, 주제넘은 생각도 해 봅니다.

달라지는 것은 거기 서 있는 우리들 뿐입니다. 저는 그래서, 오히려 그것이 가장 중요한 사실이라 생각합니다. 움직이지 않는 무덤보다, 살아 움직이는 우리가 여기 있다는 사실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400년 전 만들어진 화려한 건물 앞에서도, 중요한 것은 화려한 세공이나 잘 짜여진 대칭 같은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때로 가장 중요한 것은, 너무도 본질적이어서 눈에 띄지 않는 경우도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오늘처럼 말이지요.
덧붙이는 글 본 기사는 개인 블로그, <기록되지 못한 이들을 위한 기억, 채널 비더슈탄트>에 동시 게재됩니다.
#세계일주 #세계여행 #인도 #아그라 #타지마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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