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림사.연등과 고목, 전각이 어우러진 학림사 경내.
이상헌
추사가 제주도 유배생활을 할 적에는 손수 만든 차를 들고 서너 차례 방문하여 그를 위로했을 정도로 인연이 남달랐다. 유배가 풀려 다산이 서울로 돌아왔을 때는 초의선사를 간곡히 초청하여 2년 동안 벗하며 지냈다. 입적한 해붕대사의 초상화에 찬사의 글을 쓴 것도 김정희다. 기이한 세 사람의 인연은 초의선사가 쓴 제해붕대사영정첩(題海鵬大師影幀帖)에 잘 드러나 있다.
50대에 이른 초의선사가 일지암에 머무르고 있을 때에는 소치(小痴) 허련(許鍊)이 찾아와 가르침을 받았다. 초의는 그를 김정희에게 보내어 사사토록 하였고 당대의 지식인들과 폭 넓은 교류를 하도록 이끈다. 훗날 허련은 화가로서 대성하여 헌종 임금의 초상을 그리게 된다.
우리나라 차문화를 집대성
다산 정약용과의 교류도 빼 놓을 수 없으니 그가 강진에서 유배생활을 할 때 인연을 맺었다. 정약용은 귀양살이를 하면서 백련사 주지 혜장(惠藏)스님을 통해 불교를 접했고 차에 대한 식견과 토대를 넓힐 수 있었다.
인물은 인물을 알아보는 법, 혜장스님의 주선으로 초의와 다산의 교류가 시작된다. 훗날 초의선사는 동다송(東茶頌)을 저술하여 우리나라 차문화를 집대성하고 헌종은 이를 기려 대각증계보재존자초의선사(大覺登階普濟尊者艸衣大宗師)라는 시호를 내린다.
▲ 초의와 추사의 만남에 나온 이것... 일상다반사랍니다 ⓒ 이상헌
한국 전통 다맥은 삼국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삼국유사 가락국기에는 인도의 공주 허황옥이 금관가야로 시집을 오면서 차를 가지고 왔다고 전한다. 차는 정신을 맑게 해주므로 왕실과 불가의 수행자를 중심으로 퍼져나간다. 삼국유사에 이르기를 당시의 신라인들은 말차(가루차)를 널리 애음하여 '차를 밥먹듯 한다' 하여 '일상다반사'라는 말까지 생겼을 정도다.
고려시대에 이르러서는 차살림이 가장 융성하였으며 조선에 와서는 차례(茶禮)로 발전한다. 이후 숭유억불의 정책으로 차문화가 쇠퇴함에도 다맥을 전승하여 온 인물이 해붕대사와 다산, 초의선사다. 추사는 수시로 초의선사에게 서신을 보내 차를 보내달라고 청했으며 답례로 일로향실(一爐香室)이란 편액을 써서 보냈다.
한자를 풀어내면 '화로 하나 있는 향기로운 다실' 이란 뜻이며 송달 임무는 당연히 소치가 맡았다. 추사의 글씨는 오늘날 두륜산 대흥사 천불전에 걸려있다. 김정희에 관해서는 본 연재 46화(
청계산 오르기 전 추사 김정희를 알고 가면 좋습니다)에서 살펴봤다.
고구려의 흔적이 남아있는 수락산 보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