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 여러분 안녕하세요. 조지 포크예요.
사람들이 제일 무서워하는 게 뭔지 아세요? 진실입니다. 자신의 입에서 진실이 터져나올까 봐 두려워 하고, 남의 입이 진실을 발설할까 봐 무서워하고, 진실이 승리할까 봐 전전긍긍하면서 진실을 호도하기 위하여 거짓말을 퍼뜨리는 사람들이 이 세상에는 득실거립니다.
1884년 봄 나는 진실이 새어나갈까 봐 두려웠습니다. 부모님에게 보내는 편지만큼은 있는 진실을 꾸밈없이 담았는데 그게 혹시 밖으로 새어나갈까 봐 전전긍긍한 것이죠. 당시의 내 심리를 보실래요?
"프레이저씨가 아버님에게 제 편지를 보여달라고 한 일에 대해서는 전번 편지에서 말씀드렸습니다만 그런 요구는 주제 넘고 황당한 일입니다. 제 편지가 절대 집 밖으로 나가면 안 됩니다. 심각한 일이므로 각별히 조심해 주십사 하고 간곡히 말씀드립니다. 앞으로 언젠가 편지를 숨김없이 보여줄 때가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그 대상은 해군부 장관 혹은 국무부 장관이 될 겁니다. 제가 무슨 일로 고발을 당하여 진실을 밝히기 위해 저의 사신이 필요할 그런 경우가 되겠지요. ……기자에게 정보를 제공하는 일과 관련해서는 이미 말씀드린 대로 정부에 비판적인 내용은 결코 전해 주어서는 안 됩니다. 각별히 유념헤 주실 것을 당부드려요." - 1885. 3.12일자 편지에서
당시 나는 개인 물건을 다 도난당했기 때문에 번듯한 옷 한 벌도 없어 행색이 말이 아니었어요. 해군 소위 월급은 쥐꼬리만 했고. 헌데 당시 한국을 떠난 푸트 공사라는 자는 제물포에 정박 중인 오시피호의 사관들과 일본에 있는 선교사들에게 공사관에 가면 포크가 잘 대해 줄 거라고 인심을 썼기 때문에 내 고충은 말로 할 수 없었답니다. 내 사비로 공사가 보낸 손님을 먹이고 재워야 했으니까요.
나는 공사 대리직을 벗어나고 싶었지만 본국 정부에서는 공석 중인 공사직의 후임에 대해, 그리고 나의 신상 문제에 대해 가타부타 아무 말이 없었습니다. 우선 나는 두 달간의 일본 휴가를 신청했답니다. 무엇보다 좀 쉬면서 정신을 추스리고 싶었어요. 또한 의복이며 뭐며를 마련해 오고도 싶었구요. 또 나가사키에 카네라는 여자 친구도 있었지요.
유일한 동료였던 버나두Bernadou 소위는 공사관을 떠나 군함으로 갔지요. 우리 둘은 사이가 좋은 건 아니었어요. 하인들과 일반 조선인들에게 잔인하게 구는 그의 행동을 보며 나는 몹시 언짢았지요.
민영익은 겁에 질린 채 지방에 은거하고 있었는데 모든 계층 사람들이 그를 비아냥 거렸어요. 백성들은 민영익과 민비의 목이 달아나면 세상이 좋아질 거라고 수군거렸지요.
나는 그 해 4월 초에 사진 몇 장을 부모님에게 보냈는데 거기에는 어떤 일본인이 찍은 고종 임금 사진도 들어있었지요. 갑신정변 이전에 찍은 것이라 아주 보기 좋은 얼굴이었습니다.
한국인 여러분, 이제부터는 내가 당시 한국에서 썼던 편지를 들려드리겠습니다. 1885년 4월 3일자부터 시작할게요. 여러분이 그 시공간에서 환생하여 나의 편지를 받아본다고 생각하면 어떨까요. 단 원본 편지에서 어떤 내용은 생략할 것이고 어떤 것은 좀 풀어서 이야기하거나 재구성하게 될 것 같습니다.
1885년 4월 3일 서울에서 보낸 편지
일본 공사가 제물포에 정박 중인 운송선을 갑자기 나가사키로 보내려 합니다. 그 편에 보낼 편지를 서둘러 적습니다.
저는 여전히 홀로 살고 있습니다. 미국 공사관을 지키는 유일한 관리로서 말입니다. 난마처럼 헝클어진 일들에 어찌할 바를 모릅니다. 황망하기 그지 없는 가운데 가장 참담한 일은 우리 외교당국의 방기와 무관심입니다.
한편 북경에서는 중.일 양측이 회의를 열고 있지요. 일본 측은 중국이 조선에서 손을 떼고 철군할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현재 이곳 서울에는 중국군이 900~1300명, 일군이 600명 주둔하고 있지요. 서로가 서로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습니다.
일본군은 한판 붙고싶어 안달이 나 있는 상황이랍니다. 무력하기만 한 조선 정부는 그 사이에서 겁에 질린 채 멀거니 바라보고만 있구요. 전투가 벌어지면 중국은 조선의 참전을 강박할 것이 뻔합니다. 이렇게 말하겠죠. "우리는 조선을 돕기 위해 여기 왔다. 이제 당신들이 우리를 도와야 한다."
어제 아침에 불상사가 일어났답니다. 보초를 서던 한 일본 초병이 중국인의 가슴을 총검으로 찌른 사건이 발생했답니다. 중국인은 청나라 총독 원세계의 하인이었는데 소문에 의하면 새를 잡으러 일본 초소 안으로 들어갔다고 합니다. 아마 기르고 있던 새가 날아갔거나 아니면 새를 잡아다 기르려 했던 게 아닌가 합니다. 중국인들의 새기르는 취미는 예나 지금이나 유별나니까요.
그 중국인은 곧 사망하였습니다. 그렇게 되자 곧 난리가 일어날 것만 같아 조선 사람들은 공포에 사로잡혔죠. 문제의 일본 초병을 처형하라고 중국 측이 요구할텐데 만일 일본이 초병을 처형한다면 일본군은 틀림없이 아니, 우리 일본의 귀한 목숨 하나를 어떻게 천한 청나라 목숨 하나와 맞바꾼단 말인가! 도저히 용남할 수 없다, 라고 분기탱천한 일병들이 무슨 난리를 일으킬지 모른다고 조선인들은 생각한 것입니다. 정말 심각한 상황이 빚어진 것입니다.
조선을 떠난 푸트 공사는 내게 말 못 할 고통과 부끄러움을 안겨주었습니다. 그가 처리 하지 않고 떠난 사적인 부채에 대한 청구서가 내게 날아오기도 합니다. 재원은 없고 회계는 엉망진창이어서 어떤 공무도 집행할 수가 없습니다.
정부에서 예산을 지원해 주지 않고 있어 이 넓은 공사관을 운용하는 것조차 어렵습니다. 게다가 푸트 공사는 손님을 이곳으로 보냅니다. 그들을 먹이고 재울 수가 없습니다. 저는 옮도 뛰도 못하는 핀치에 끼어 있답니다. 개인적인 고충도 고충이지만 자랑스런 조국 미국의 공사관이 이처럼 손님을 맞을 수도 없는 초라한 지경이라는 사실이 참담하기만 합니다. 어떤 나라의 공사관도 이러지는 않을 겁니다.
이 와중에 5명의 선교사가 제물포에 입항하였습니다. 이 사람들은 위풍당당한 독수리가 새겨진 편지를 보내왔는데, 자신들은 미국 국기의 보호 아래 선교 활동을 하기 위해 조선에 왔노라고 적혀 있더군요. 천지분간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나는 회신을 보내 현지 상황을 자상히 설명해 주었습니다. 즉, 나는 여기에서 아무런 신분 보장도 받지 못한 채 불안정한 생활을 하고 있는 중이다, 언제 이 도시를 떠나야 할지도 모른다, 조선 정부는 너무 무력하여 무법과 약탈, 폭동이 일어나도 그것을 막을 수 없다, 개화파들은 외국으로 피신하였다, 서울에서 중.일 병력간에 일촉즉발의 위기가 감도는 가운데에 북경에서는 담판이 진행되고 있다, 헌데 조선인들은 왜인과 외국인의 차이를 모른다, 거처도 없고 언어도 모르는 선교사들이 지금 대책없이 여기 오는 건 위험한 일이다….
나는 그들을 설득하여 나가사키로 되돌려 보냈답니다. 일본에 체류중인 다른 선교사들도 조선에 오겠노라고 연락을 해 왔는데 나는 단호히 거절했습니다. 푸트 공사가 이 사람들의 조선행을 권유한 것으로 보입니다. 거처를 구할 때까지는 공사관에 머물라고 하면서 말입니다. 조선을 떠난 푸트 공사는 귀로상에서 만나는 사람들마다 조선은 평화롭다고 말했습니다. 자신이 위험을 피해 도망간 사실을 은폐하기 위해 거짓말을 한 것이죠. (...)
- 다음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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