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아오라리조트와 한미리스쿨키아오라리조트와 한미리스쿨의 밤 풍경. 나의 제주살이에 관한 글이 ‘고등학교 졸업 50주년 기념문집’에서 유일하게 빠져 논란이 일었다.
이봉수
고교 동기회 단체대화방에선 무슨 일이 벌어졌나
13일 밤, 페이스북에 'TK 출신이 살아가기 힘든 이유'라는 글을 올렸다. 아래 첨부한 대로 '고등학교 졸업 50주년 기념문집'에 내 원고가 실리지 않은 섭섭함을 토로한 글이었다. 그 글에는 폐기된 내 원고도 첨부했다. 페이스북 글을 본 한 동기생은 단체채팅방을 통해 편집위원회에 내 원고가 빠진 이유를 해명하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카톡의 의견은 문제 제기에 동의하는 이는 소수였고, 다수는 '조용히 대화로 해결하지 글로써 많은 사람의 마음을 불편하게 한다'거나 '공개질의서에 답하라는 것은 친구들 사이에서는 적합한 접근법이 아닌 것 같다'는 식이었다. 분위기가 이렇게 돌아가자 글을 뺀 당사자인 편집장은 경위 해명이나 사과는커녕 다수 의견에 '좋아요'를 누르는 식으로 대응했다.
나도 처음에는 '조용히' 넘어가고 싶었다. '스스로 사과하겠지' 하는 기대도 있었다. 동기생 단톡에 피해자인 나의 의견을 일절 밝히지 않은 것도 '평지풍파'를 일으키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렇게 대중매체에 싣기로 마음을 고쳐먹은 것은 첫째, 동기회 카톡에서 그런 공방을 더 이상 벌이지 않았으면 한다는 동기회장 등의 부탁이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실명을 밝히는 것을 원칙으로 기자 생활을 해왔지만 이 글에서는 동기생들을 배려해 실명은 물론 출신 고교 이름도 밝히지 않겠다. 특정학교만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기도 하다(나는 페이스북에도 학력을 밝히지 않고 있다).
둘째, 동창회나 다른 친목 모임에서도 툭하면 '사상 시비'가 붙는 자의 고통이 얼마나 심각한지 모를 뿐더러 그것이 나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념 과잉의 시대가 도래하면서 '사람의 마음을 불편하게' 하는 정도가 아니라 삶 자체를 피폐하게 만드는 일이 일상 속에서 일어나고 있다.
가입의사도 없이 소속되기 때문에 편안해야 할 일차원적 공동체에서 소수에게 낙인을 찍어 배제하는 문화가 싹트는 정도가 아니라 무성해지면서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우리 사회에 뿌리박은 차별의식이나 '구별짓기'가 비공식 모임 안에서도 성행하고 있는 것이다. 페이스북 글을 본 수많은 언론인 등은 자기 경험을 털어놨고, 그중에는 개인적으로 부담되겠지만 개인 문제가 아니니 공론화의 첫발을 내디뎠으면 좋겠다고 전화해준 이들도 있다. 기사로 쓰려고 취재하려는 이도 있었는데 자칫 왜곡될 수도 있어 불응하고 내가 직접 쓰기로 했다.
'내가 하는 일'이 공산당이 하는 일인가?
셋째, 결정적 요인은 한 동기생이 너무나 심한 모욕을 내 배우자에게 퍼부은 사실을 이번 일이 터지고야 알았기 때문이다. 어느 해 송년회에서 부인들만 10여 명 앉아있는 둥근 식탁에 한 동기생이 찾아와 "이봉수 부인이시죠"라며 말을 걸더니 귀에다 대고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라고 말했다는 것이었다. 그는 그 직전에 무대로 나가 뜬금없이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라고 부르짖고 내려가길래 나를 겨냥한 줄 알면서도 모른 척했는데, 만만한 이에게 '확인 사살'을 한 거였다. 그가 바로 이번에 편집장을 맡은 동기생이다.
당시 "너무나 모욕감과 수치심을 느꼈다"는 말을 어제 전해 듣고 "왜 그때 말하지 않았느냐"고 불같이 화를 냈더니 "당신한테 말했으면 동창회 자리가 어떻게 됐겠느냐"고 반문했다. 아내는 안 그래도 칼럼 댓글 등으로 수없이 '좌빨' '공산당' 소리를 들어 우울증까지 있는 남편을 보호하려고 여태 참아왔던 것이었다. 그녀에게는, 남편이 삼성 재벌과 맞서다가 <한겨레>를 그만두고 나이 마흔일곱에 유학을 떠나, 영국에서 외국인 하숙을 치며 일가족을 먹여 살려야 했던 트라우마가 남아있다.
TK 출신은 중도진보 성향만 있어도 얽히고설킨 혈연·지연·학연 속에서 살아가는 게 보통 일이 아니다. '침묵의 나선 이론'이 밝혀낸 것처럼, 신념과 다른 말을 듣더라도 반박하지 못하고 속이 썩어 들어갈 수밖에 없는 처지다.
TK지역은 원래 보수가 아니라 진보의 본거지였다. 조선시대 중기 이후에는 남인의 세거지로서 기득권층인 노론에 목숨 걸고 저항했고 일제시대에는 좌우 가릴 것 없이 수많은 독립투사를 배출한 지역이다. 심지어 박정희 시대에도 저항정신을 이어가다가 인혁당 사건 등으로 억울한 희생을 치른 곳이다. 뒤늦게 재심에서 무죄 판결들을 받았지만 대구의 혁신세력이 멸절되는 한 요인이었다.
초·중·고 동창회에서는 정치 이야기를 안 하려고 노력하지만, 미리 가짜뉴스를 가지고 나를 설득하다가 안 되면 "뉴스도 안 보나" "공부 쫌 해라" "책 좀 읽어라" 같은 말을 듣기 일쑤다. 초중고 동창생들에게 나를 이해시키려고 60만 원쯤 들여 원하는 이 모두에게 내 책을 선물하기도 했는데 효과는 별로 없었던 듯하다.
칼럼으로 대선후보 홍준표를 비판했을 때는 같은 TK인 세명대 교수로부터 "다음 정권에서 한 자리 하려고 커밍아웃하냐"라는 비아냥까지 들었다. 국회 등 관변 쪽에서 요직을 제안한 적이 여러 번 있었지만 다 거절했다.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들이 더 중요하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국회의장이 방송통신심의위원(부위원장)을 추천해 13일 내정자가 발표됐는데, 실은 한 달여 앞서 국회 과방위 소속 의원으로부터 민주당몫 위원으로 추천하겠다는 제의를 받았으나 거절했다. 벌여놓은 일도 많지만 가봤자 회의에서 퇴장하는 것밖에 저항 수단이 없는 상황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