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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사범 거쳐 이화여전 교수로

[김삼웅의 인물열전 - 딸깍발이 선비 이희승 평전 8] 교수가 되어

등록 2024.03.07 08:18수정 2024.03.07 0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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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구 현풍초등학교 교정의 황국신민서사비
대구 현풍초등학교 교정의 황국신민서사비정만진
 
그는 1930년 4월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조선어학급 문학과를 졸업했다. 이해 9월에 장녀가 태어났다. 부양해야 할 식구가 늘어나면서 취직이 시급했다. 경성제국대학 출신 가운데 법학과 등의 졸업생에는 총독부 산하 판검사 등 출세의 길이 있었으나 그의 전공분야인 조선어학은 일제식민체제에서 쓸 곳이 거의 없었다.

그나마 취업이 가능한 자리가 사범학교 교사였다. 다행히 다카하시 선생의 주선으로 경성사범학교 교유(敎諭)에 취업하였다. 당시 중학교 교사를 교유라 불렀다. 일제는 충용스런 일본인으로 교화시키고자 전국 각지에 사범학교를 세웠다. 뒷날 사범학교 교사 중에 악질 친일파가 적지 않았다. 그는 정식 교유가 아닌 강사자격이었다가 얼마 후 정식교사로 발령되었다. 

경성사범학교 교유는 생계용 취업이지만 그의 성향에는 맞지 않았다. 어학회 활동을 금지당하고 언론에 글을 발표하는 것도 막았다. 최규동 선생의 청에 따라 중동학교에 몰래 하루 2시간씩 출강하여 우리말을 가르치는 일이 그나마 숨쉴 수 있는 역할이었다. 이 역시 언제 들통이 날지 불안한 상태였다. 

경성사범학교는 학생들의 머리에 황국정신을 집어넣는다고 별별 행사와 의식을 다해서 아주 괴롭고 비위가 틀렸다. 아무튼 경성사범학교에 있었던 2년간이 내 인생을 통해서 가장 정신적으로 고민을 많이 한 때였다. 훗날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감옥에 들어가 있을 때도 육체적으로는 괴로웠지만 마음은 오히려 경성사범학교 때 보다 편했다.(주석 1)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열린다고 했던가. 마음 고생을 겪고 있을 즈음 이화전문학교 교수로 초빙되었다. 1932년 4월이다. 이화여전은 배화학당의 설립자인 아펜셀러의 딸이 교장으로 재직하면서 문과, 가사과, 음악과 등 3개학과로 학생 수가 200명도 못되는 작은 규모였다. 그는 문과에서 한글을 가르쳤다. 

교수진은 여성이 많았다. 남성은 문과에 김상용·한치진·김인영·장기원·김호직·안기영·이태준 등이고 여자는 박마리아·김신실·서은숙·김애마·윤성덕 등이었다.

문과 학생에는 노천명·유용녀·김갑술·최순·배국화·홍복유·김정옥·최순 등이었다. 모윤숙은 한 해 전의 졸업생이었고, 김옥길·정충량·전숙희·조경희·원선희·이봉순 등 뒷날 여류명사들이 차례로 입학하였다.


이희승은 열정적으로 조선의 젊은이들에게 우리 글과 어문학을 가르쳤다. 무엇보다 감시와 활동의 제한이 풀리게 되어 행복하였다. 지체 없이 조선어학회에 참여하고 간사로 선출되었다. 해방이 될 때까지 간사직을 맡았다.

이화여전에 있을 때에 고 김상용 형의 우정을 잊을 수가 없다. 김형은 나의 인생을 통하여 둘도 없는 막역한 친구였다. 팔방미인이라고 오해를 받을 만큼 인품이 원만하고 다방면의 재주를 갖춘 사람이었다. 그의 전공을 영문학이었으나 당시 그는 이화여전의 문과과장의 일을 맡아 비범한 수완으로 사람들을 통제하였다. 김군과 나는 만나기만 하면 피차 유머로 응수했다. 나에게 '대추씨'라는 별명을 지어준 것도 김군이었다. 김군은 나보다 4, 5년 연하였으나, 나보다 먼저 이전의 문과과장을 역임했다. 호를 월파(月坡)라고 하여 서로 다정하기 이를 데 없는 사이였는데, 부산 피난시 객사에서 그만 애석하게도 저 세상으로 가고 말았다. (주석 2)


그가 이화여전에서 보람을 느낄 수 있었던 일은 조선어학회에 참여하고 핵심역할을 하게 된 것이다.

1936년 8월에 부임한 미나미 총독은 이듬해 2월 모든 관공서 관리와 교직원들에게 일본어를 상용할 것을 지시하고, 1938년 3월에는 칙령 제10호로서 이른바 신조선교육령을 공포하여 조선어 교육을 금지하도록 하였다. 일찍이 제국주의 역사상 식민지 주민에게 고유한 언어와 문자를 사용하지 못하게 한 경우는 일제가 유일하다. 일제는 허울좋은 내선일체의 시책을 추진하면서 우리말과 글을 사용하지 못하도록 하고 일본어를 '국어'라고 강변하면서 이를 상용하도록 했다. 철저한 민족정신 말살의 흉계였다.

일제는 '민족언어'의 중요성을 아는 까닭에 우리말과 글을 못쓰도록 하는데 그토록 집요했던 것이다. 그들은 강점 이래 기회가 있을 때마다 조선어 사용 금지를 획책해 왔다.

초대 총독 데라우치는 1911년 전문 30조의 제1차 조선교육령을 공포하여 초기 식민지 교육방침을 제시했다. 그 의도는 ① 일본어 보급을 목적으로 했으며 ② 한민족을 이른바 일본의 '충량한 신민'으로 만들고자 했으며 ③ 노동력을 착취하기 위해 조선인에게 저급한 실업교육을 장려하고자 했고 ④ 조선인을 우민화시키는데 목적이 있었다. 

1919년 3·1혁명 이후 개정된 제2차 조선교육령에서는 사이토 총독의 이른바 '문화정책'의 미명 아래 내막적으로는 일본식 교육을 강화하여 우리의 민족정신을 말살시키고자 하였다. 총독부는 이어서 1938년 황국신민화를 더욱 철저히 추진한다는 명목으로 제3차 조선교육령을 개정하여 ① 교명을 일본인 학교와 동일하게 개칭하여 형식상으로는 조선인과 일본인 간에 차별이 없는 것처럼 하였으나, 실제로는 일본인이 사립학교의 교장이나 교무주임의 자리를 차지하도록 하고 ② 교육내용은 일본어·일본사·수신·체육 등의 교과를 강화시켰다. 

3차 조선교육령은 또 조선인학교명을 일인학교명과 같이하여 보통학교를 심상소학교로, 고등보통학교를 중학교로, 여자고등보통학교를 고등여학교로 고치고, 조선어 과목을 모조리 폐지시켰다. 일제는 이같은 단계를 거쳐 1943년 3월에는 제4차 조선교육령을 공포하여 모든 교육기관에 대한 수업연한을 단축시키는 동시에 '황국신민화를 위한 국민연성'을 교육목적으로 내걸기에 이르렀다.

신교육령을 반포하면서, 총독 미나미는 소위 '국어상용령'을 발표하여 ① 조선총독부·부(府)·도·군·읍면 사무소·학교·기타 일체의 관공서에서 조선어의 사용을 금지시키고 ② 조선인 고관·유력자 등은 가정에서 일본어를 상용하며 ③ 모든 회의석상에서 그 상대자가 일본어를 알든 모르든 일본어로써 회의를 진행토록 명령하였다. 일제가 '최후발악'으로 식민교육과 조선어사용 금지, 학생들의 근로동원·학도병 동원에 혈안이 된 것은 1943년 제4차 조선교육령을 선포하면서이다. 

이 시기는 '국체명징' '내선일체' 등의 전투적인 슬로건을 내걸고 황국신민화 교육에 광분할 무렵이다. 모든 교과목에서 조선어를 단계적으로 추방하는 대신, 일본어를 보급하며 기술교육을 확대하여 조선인 노동의 질을 향상시켜서 전시에 필요한 생산증대를 도모하는 한편 조선민족의 정신과 공동체를 허물고자 했다. 이희승이 한글을 가르칠 수 있었던 것은 이 학교가 외국인이 세웠고 교장이 외국인이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주석
1> <회고록>, 99쪽.
2> <자전적 교우기>, <한 개의 돌이로다>, 38쪽.
덧붙이는 글 [김삼웅의 인물열전 - 딸깍발이 선비 이희승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이희승 #이희승평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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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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