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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환교수로 1년간 미국 체류

[김삼웅의 인물열전 - 딸깍발이 선비 이희승 평전 19] 황폐해진 조국과 달리 미국은 그야말로 신세계였다

등록 2024.03.18 08:24수정 2024.03.18 0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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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5년 '조선표준어' 사정위원회 때의 '조선어학회' 기념사진(1.이윤재 2.한징 3.안재홍 4.이숙종 5.이희승) 1935년 '조선표준어' 사정위원회 때의 '조선어학회' 기념사진(1.이윤재 2.한징 3.안재홍 4.이숙종 5.이희승) ⓒ 이철형

 
3년 동안 전개된 6.25전쟁은 남북 쌍방에 약 150만 명의 사망자와 360만 명의 부상자, 국토의 피폐화를 가져왔고, 남북에 이승만과 김일성의 독재체제가 강화되었으며, 남북분단 구조가 더욱 굳어졌다.

이희승의 집안도 적잖은 희생을 치러야 했다. 그는 이같은 상황에서도 1953년 2월 <국문학개관(고전편)>을 국민사상연구원에서 펴내고, 2월 29일 서울대학교 대학원 부원장에 임명되었다. 3월 15일에는 <중등글본>을 민중서관에 간행하였다. 이런 저서들은 피난지에서 쉼 없이 연구를 거듭하여 생산한 결과물이다. 

그러던 중 9월에 미국 국무성의 초청을 받았다. 내용인 즉 1년간 캘리포니아대학과 예일 대학에서 각기 반년씩 체류하는 교환교수였다.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왕복 비행기값은 물론 체류 비용 일체를 그쪽에서 부담하는 조건이었다. 전쟁 직후여서 아직 국내의 학교는 물론 사회가 안정되지 못한 상태였으나, 그는 이 기회에 미국의 이면을 살피고, 필생의 과제인 언어학을 더 연구하고 싶었다.

9월 18일 각 대학에서 선발된 교수 9명과 함께 부산 수영공항을 통해 일본을 거쳐 미국 시애틀에 도착했다. 각자 방향이 달라서 일행과 헤어져 첫 미국행이 혼자서였다. 뒷날 이 때의 '실수 몇 가지'를 수필로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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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이 목숨이라는 외솔 선생의 말씀 광복 뒤부터는 일본 식민지 앞잡이 교육기관인 경성제국대학 출신인 이희승, 이숭녕 교수와 그 제자들이 그랬고 김종필, 이한동 전 국무총리 같은 정치세력과 농심, 대한항공, 효성 같은 친일 재벌과 조선일보 같은 언론 재벌이 한글을 못살게 굴었다. ⓒ 김형태

 
맥주에 속고 택시를 모르고

호텔에 방을 잡아 놓고 저녁 식사를 하려 하니 호텔 종업원의 말이 "우리 호텔에는 식당이 없으니 길 건너 음식점으로 가시지요." 한다. 이리저리 기웃거리다가 자그마한 대중적인 음식점을 하나 발견하였다. 호트도그(Hotdogs)니, 치킨파이(Chicken Pie)니, 햄버거(Hamburger)니 하는 등등 처음 보는 명칭의 음식들이 적힌 삐라가 주루룩 붙어 있고, 그 명칭 옆에는 가격이 표시되어 있다. 값이 많지 않는 그럴 듯한 음식을 하나 주문하고, 컵으로 파는 롯비어(Rootbeer)라는 것이 있기에, 한 잔 주문하여 미국 맥주 맛을 처음으로 감상하여 보려 하였다. 

그랬더니 그 맛이 들큰도 하고 덥적지근도 하며, 시큰한 맛도 있는 듯하였다. 알코올은 당초에 1퍼센트도 없는 성 싶었다. 알고 보니 이것이 무주정(無酒精) 맥주라는 것이다. 헛다리짚은 미국 맥주의 감상, 싱겁기가 짝이 없는 일이었다. 미국에서는 식당이나 음식점에서 술을 파는 법이 없다. 술을 먹으려면 따로 바(Bar) 같은 데로 가지 않으면 안 된다.

이튿날 캘리포니아 대학으로 가기 위하여 길에 나서 보니 내 눈에 보기에는 모두가 고급 하이어로 꼬리에 꼬리를 물고 줄을 지어 진행하고 있다. 나는 그것들이 죄다 택시인 줄 알고 아무 놈이나 스톱(Stop)을 시켜 놓고 캘리포니아 대학으로 가자고 말하였다. 그러나 그 모두가 우리는 택시가 아니라고 거절하였다. 나는 무수히 신고하다가 정말 택시 한 대를 붙잡았다. 미국 각 도시를 통하여 'Yellow Cap'이라고 이르는 누렁칠 한 택시가 있고 또 황색이 아니라도 차대 지붕 위에 조그마한 표지를 세워서 작은 글씨로 택시라는 것을 표시한 것이 있다. 맨 처음부터 이런 것을 구별할 줄 아는 총명을 나는 가지지 못하였었다.   


물과 주(主)·객(客)

이 밖에 자질구레한 실수는 여러 번 경험하였다. 우유 넣은 유리병을 종이 마개로 막았는데, 이것을 까딱 잘못 열다가는 식탁에 우유 방울이 헤어져 퀴기가 십상팔구다. 종이 마개 복판을 손톱이나 나이프(Knife) 끝으로 베집어 일으키면 종이 뚜껑을 도려서 만든 조그마한 꼭지가 나타난다. 요것을 엄지와 집게 두 손가락으로 집어서 살며시 젖히면 뚜껑이 가만히 열려져 우유가 엎질러지거나 튀어나오지 않게 되므로, 식탁을 함께 하는 다른사람에게 실례를 면하게 된다. 그러나 좀 되통스러운 사람은 곧잘 우유를 엎질러서 자기는 물론 남의 음식이나 옷에 우유 투성이를 만들어 주기가 십상팔구다. 나도 한두 번 이런 일을 저지를 뻔하였다. 

대개 음식점에 들어가 앉으면, 시중드는 사람(Waiter, Waitress)이 으레 유리컵으로 물을 따라주는 것이 관례로 되어 있다. 그러나 음식 날라오는 시중을 손님 자신이 하는 카페테리아(Cafeteria) 같은 데서는 물도 자작 따라 먹든지 식탁에 가져다 놓고 먹든지 한다. 이 카페테리아에는 수많은 식탁이 놓인 식당 어느 귀퉁이 적당한 곳에 물 따라 먹는 수도꼭지가 있고, 이 수도꼭지는 한손으로 고동을 틀고 다른 손으로 물을 받고 하여 두 손을 다 사용할 필요가 없이 한 손으로 컵을 들어서 물 나오는 꼭지에 대고 그 컵을 앞으로 내밀어서 고동을 누르면 물이 졸졸 나오게 되어 있다. 이런 것도 처음에는 물을 따를 줄 몰라서 병신 구실을 하기가 쉽다. (주석 1)

참혹한 전쟁을 겪고 전란으로 황폐해진 조국과 달리 미국은 그야말로 신세계였다.  

1년 동안의 미국생활을 통해 느끼고 배운 점이 많지만, 그들의 검소하고 솔직하고 이재에 밝은 생활태도와 과학적이고 실용적이고 자주적인 생활양식에 많은 감동을 받았다. 

예일대학에서의 한 학기가 끝나고 나는 1954년 8월 18일 귀국했다. 다시는 미국에 올 기회가 없을 것 같아서 귀로에 긴 여행을 하여 유명한 관광지와 대학 등을 두루 둘러보았다. 슈헤이븐을 떠나 보스턴을 방문하여 하버드대학을 보고, 코넬대학에 들렀다가, 버팔로에  들러 나이아가라 폭포를 구경했다. 역시 웅대한 장관뿐이고 금강산 구룡폭포처럼 아름답지는 못 했다. 

디트로이트·세인트루이스·뉴올리언스·마이애미·워싱턴·솔트레이크시티·로스앤젤레스·호놀룰루에 들렀다가 도쿄를 거쳐 11개월 만에 서울에 되돌아왔다. (주석 2)


주석
1> <실수 및 가지>, <한 개의 돌이로다>, 102~103쪽.
2> <회고록>, 215~216쪽.
덧붙이는 글 [김삼웅의 인물열전 - 딸깍발이 선비 이희승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이희승 #이희승평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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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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