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어학회에서 펴낸 책들조선어학회에서 발간한 한글 교재
독립기념관
이와 관련 문교부는 '국어심의회 규정안'을 만들고 심의위원으로 최현배 등 50명을 임명했다. 위원장은 백낙준이었다. '심의회'는 10월 1일 열린 전체회의에서 정부의 뜻과는 달리 한글간소화안에 대한 반대 의결을 하고 말았다. 최현배는 이를 계기로 편수국장을 사임하고 정부의 한글간소화 정책을 거세게 비판하였다. 한글학회를 통해서였다. 이승만은 한글학회가 주관하는 <큰 사전>의 간행도 방해하는 등 비민족적인 태도를 보였다. 최현배는 분노를 참기 어려웠다.
더구나 부산에서는 한글 맞춤법을 옛 성경식 맞춤으로 돌리라는 시대 역행의, 학문의 진보를 부인하는 이승만 씨의 엉뚱한 명령으로 인하여 우리 한글 동지뿐 아니라 일반 국민의 놀람과 의구, 분개와 반항을 크게 일으켰었다. 그뿐 아니라 이승만 대통령은 은근히 <큰 사전> 인쇄의 완성을 위한 록펠러 재단의 원조를 거부 방해하였다. (주석 2)
국민들의 거센 반대여론에 밀린 이승만은 1956년 9월 "민중들이 원하는 대로 하도록 그 자유에 부치고자 한다"는 담화를 발표함으로써 2년여를 끌어오던 한글파동은 마무리 되었다.
그가 귀국했을 때는 어느 정도 진정되고 있었으나 학계에 남긴 후유증은 만만치 많았다. 대학원 부원장으로 재직 중 1957년 7월 문리대 학장 김상기의 임기 만료로 그 후임이 되었다. 학자일 뿐 벼슬이나 감투에 관심이 없었던 그에게 학장의 감투가 쓰인 것이다.
해방 직후 경성대학 시절부터 법문학부장 자리를 굳이 사양했고, 부산 피난 시절에도 문리대 학장을 맡아달라는 총장의 권유를 물리쳤던 나는 투표에 의해 그 자리에 앉고 말았다. 과제만 끝내는 명예롭지 못한 사건으로 1년도 못 되어 물러나야 했다.(주석 3)
사건은 문리대 학생신문 <우리의 구상>에 대학생인 유근일의 <모색>이란 기고문이었다. 문제가 될 만한 글이라 판단하고 교무처장과 학생과장을 불러 신문의 회수를 제시했지만, 이미 외부로 상당분량이 배포된 상태였다.
이희승은 동대문경찰서에 소환되어 조사를 받았다. 집필자 유군은 구속되었다가 풀려났다. 그는 이 필화사건으로 학장 자리를 사임하였다. 원치 않는 감투를 썼다가 당한 화였다.
시국은 이승만 대통령의 끝간 데 모르는 권력 욕망으로 3.15 부정선거가 저질러지고 이에 항거하는 부정선거 규탄의 시위가 남쪽에서부터 시작되었다. 그대로 앉아 있을 수 없었다.
주석
1> 석문주, <이선근과 한글 간소화 파동>, <흑막>, 186쪽, 실화임시증간호, 1960.
2> 최현배, 앞의 책, 192쪽.
3> <회고록>, 222쪽.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탈자 신고
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기사를 스크랩했습니다.
스크랩 페이지로 이동 하시겠습니까?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