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혜영 재즈 보컬리스트. 오른쪽은 반려견 해리.
최방식
'여주·양평 문화예술인들의 삶' 스무 번째 주인공 나혜영(55·여, 무대 이름 '나나') 재즈 보컬리스트의 말이다. 봄비가 축축이 내리는 5일 양평 덕평리 집에서 만난 그는 '재즈 인생'을 이렇게 회고했다. 4집 앨범(바람이 불어온다) 노트에도 '열정 하나로 버텨온 삶'이라 기록하고 있다. '철부지 처녀'는 사라지고 앨범 속 '음악'만 남았다고 푸념하면서.
어려서부터 남다른 흥과 노래 재능을 가지고 있던 나씨. 팝 가수를 하겠다고 바쁠 때였다. 한 밴드 마스터가 재즈가 어떠냐고 권해 몇 달 연습해 무대에 섰다. 공연을 마치자마자 울음보를 터뜨리고 말았다. 연습 때와 다른 밴드 연주에 어찌할 바를 몰랐던 것.
"그저 노래만 잘 하면 되는 줄 알았죠. 재즈가 즉흥성을 기본으로 한다는 걸 몰랐으니까요. 밴드도 가수도 알아서 맞춰야 하는데, 그걸 알 리 없는 전 연주를 따라잡지 못했죠. 재즈 본고장에 가서 제대로 배워야겠다고 맘 먹고 짐을 쌌어요."
학업·알바 보스턴 뉴욕 오간 고달픈 삶
버클리음대에 가겠다고 1997년 편도 항공권 한 장 들고 보스턴행 비행기에 오른 것이다. 가업이 기울어 돈도 없었다. 운 좋게 몇 개월 만에 입학했다. 한국의 통기타 그룹 쉐그린(노래 '동물농장') 구성원 전언수씨가 뉴욕에서 운영하는 라이브카페에서 노래 알바로 학비를 벌며 프로페셔널뮤직(보컬) 4년 공부를 마쳤다.
"재즈 보컬리스트로 데뷔한 곳도 뉴욕의 쉐그린이에요. 알바 시절 만석을 기록하곤 했는데, 인기가 좋다고 여겼는지 다시 와달라고 부탁하더라고요. 꽤 이름 있는 밴드와 트리오를 결성해 시작했죠. 산마르코 등 현지의 유명 재즈 클럽에도 여러 군데 출연했어요."
2016년 한국에 들어오기 전까지 클럽 제이지(J'z)와 맥심 정기공연(매월), 클럽 트리오와 레스토랑 '뉴욕뉴욕' 정기공연(매주), 뉴저지 맥제이홀과 호주 시드니 등에서의 단독 콘서트, 뉴욕미스코리아대회 및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 초청 콘서트, 버클리 리사이틀홀 콘서트 등 수많은 무대를 거쳤다. 1집(하얀나비 목로주점 등 70년대 음악을 재즈로 편곡한)부터 3집까지 음반도 냈다.
뉴욕 한인사회를 넘어 뉴욕커들의 호평을 산 그의 재즈. 어떤 멋과 맛이 있을까 궁금했는데, 그는 명확한 메시지 전달을 첫 번째로 꼽았다. 슬로 스윙(밀고 당기기)이 강한 뉴욕 정통 재즈에 가사 전달을 명확하게 해 청중들이 쉽고 재미있게 접근할 수 있게 한 것이다.
'트롱프뢰유'라는 미술장르가 있다. 그림과 실제를 혼동케 하는 착시효과를 활용한다. 파이프 밑에 '이것은 파이프가 아닙니다' 써놓은 르네 마그리트의 그림(1929년 '이미지의 배반')이 그거다. 표현의 본질에 도전했달까. 문자를 시각요소로 활용해 이미지 해석에 영향을 끼친, 소통하는 예술. 그림으로 말을 건 능동의 미술. 메시지를 건네고 몸을 들썩이게 하는 나혜영의 음악. 소통의 재즈라 할까.
그는 뉴욕에 거주할 때도 한국을 오가며 무대에 서고 강연을 다니곤 했는데, 귀국하고부터 한양여대(실용음악과) 겸임교수를 맡고 있다. 서울종합예술학교·경민대·명지전문대·백석대 등에서 전임·외래 교수(강사)를 지내기도 했다. 4집 앨범(바람이 불어온다)도 2016년 냈다. 하지만 국내 음악 활동은 그리 매끄럽지 않았다.
"잘 안 섞인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나이 들어 그런지, 오지랖이 덜 넓어선지 힘들었어요. 강남에 거주했는데, 돈으로 얼룩진 두 얼굴의 도시였어요. 약속해 놓고 안 지키고, 후원하겠다는 이가 빈털터리고, 사기에 보이스피싱까지, 정말 힘들었어요."
메시지로 몸 들썩이게 하는 '소통 재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