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항의 일본군1894년 5월 9일 인천항에 상륙하는 일본군 모습.
인천광역시청
일본은 음흉한 속내를 즉각 드러낸다. 철병 회담 자체를 파탄으로 몰아간다. 방향은 이미 정해져 있다는 시위다. 철병을 거부하고 조선 내정에 개입한다. 개혁을 떠벌인다. 심각한 간섭이다. 어떤 방법이건 전쟁을 일으킬 명분을 찾으려 든다. 곳곳에서 침략 본성이 드러난다.
조선은 6월 11일(음) 독자적이며 자주적 개혁을 시행하겠다는 의지로 교정청(校正廳)을 설치한다. 급한 불을 꺼보려는 고육지책이자 몸부림이다. 개혁하자고 백성이 총검을 들고 전주성을 점령할 때까지 요지부동이던 권력으로선, 경천동지할 일이다.
일본은 간섭을 더욱 노골화한다. 6월 15일 조선 정부에 내정을 개혁하라며 일방적으로 통고한다. 이틀 후엔 시한을 정해 청국과 주종관계를 폐기하라 강압한다. 청나라엔 철병하라 요구한다. 조선과 중국을 상대로 전쟁을 벌이려는 포석으로, 동북아 세력 재편을 노린 노골적 야욕이다. 이제 희망은 오직 동학혁명군뿐이다.
처음 겪는 신세계... 우리가 직접 다스릴 수 있다니
전주화약이 이뤄지자 농민들은 신이 나서 고향으로 돌아간다. 무엇보다 보리 수확이 급했다. 달포 가까이 집을 떠난 객고도 크게 작용했다. 동네마다 어느 해보다 행복하고 즐겁게 봄철 농사일을 해내고 있었다.
아마도 처음 겪는 경험일 터이다. 이때 농민들이 보고 체험한 건 신세계다. 만인이 평등하단다. 억압과 수탈도 없으며, 백성의 힘으로 스스로 고을을 다스린단다. 이는 동학혁명이 백성에게 가져다준 가장 큰 선물이다.
어디를 가나 흥겨운 농악 소리에 인심 좋은 음식 추렴이 있었고, 동네마다 활기찬 생기가 돌았다. 고된 일도 같이 나누는 술 한잔이면 거뜬했다. 특히 고부는 더 했다. 을씨년스럽고 스산한 3월의 상처가 아물고, 그 흉터 위로 봄의 새싹처럼 새 살이 돋아나고 있었다.